'쇼핑 테라피'에 해당되는 글 4건

  1. 2008.04.12 쇼퍼홀릭의 커밍아웃: 지름의 끝은 어디인가? 10 by 알 수 없는 사용자
  2. 2008.02.28 ibm 노트북을 중고로 사는 여자는 누구인가? 30 by 알 수 없는 사용자
  3. 2008.02.12 원룸족을 위한 기숙사형 인테리어 6 by 알 수 없는 사용자
  4. 2007.12.02 어디서나 통하는 패션 아이템이란 존재하는가? 2 by 알 수 없는 사용자

반짝이는 건 은수저부터 껌종이까지 죄 둥지로 물어나르는 까마귀처럼, 할인매대에 누운 옷들을 게걸스레 긁어모은다. 그게 시작이다. 그러다 점차 옷걸이에 걸린 옷들로 눈이 가고, 제몸에 맞는 핏을 찾아내고, 웬만하면 자신을 실망시키지 않는 브랜드 몇가지를 골라 충성하는 단계가 온다. 다음은 구두다. 그 다음은? 가방? 혹자는 옷-구두-가방-속옷-시계-주얼리가 패션 마니아 혹은 패션 신불자로 가는 수순이라고 말한다. 그렇다면 그 다음은? 붓글씨의 대가가 종국엔 괴발개발 어린애 낙서로 돌아가곤 하는 것처럼, 지름의 끝에 이르면 물욕이 일지 않는 무념무상의 경지가 펼쳐질까?

뉴욕에 온 지 두 달만에 빈티지 숍과 디스카운트 스토어를 돌며 야금야금 사들인 신발이 벌써 6켤레. 그전까지 평생 내 돈 들여 산 신발 수와 맞먹는다. 어젠 급기야 상품권 남발하는 웬만한 국내 가죽 브랜드 제품한 가격인 30% 세일가에 나온 마크 바이 마크 제이콥스와 클로에의 가죽 백들을 보며 30분간 똥 마려운 강아지처럼 진열대 앞에서 안절부절 못하다가 눈물로 작별을 고하고 돌아섰다(안녕 마크, 안녕 클로에, 언니가 돈 많이 벌어서 데리러 올게, 라고 한국말로 소근대는 날 보며 센추리21의 흑언 언니는 몹시 의심스런 표정을 지었더랬다). 물론 가장 큰 이유는 돈이 없어서다. 그렇다고 이 불타는 물욕을 잠재울 자신은 또 없기에, 가격 대비 가장 효율적인 쇼핑을 곰곰 연구했다. 결론은, 이런저런 자질구레한 것들을 사고 또 사봤자 결국엔 눈만 살살 높아져 끝없이 돈을 써댈 테니, 차라리 엄청 비싸면서 절대 유행을 타지 않는 궁극의 물건을 하나 갖고 나머진 잊자는 거다. 그리하여 난샤넬백을 사기로 마음 먹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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샤넬 2.55백. 사랑하오. 나의 마지막 가방이 되어주겠소?

차라리 에르메스를 사지 그러냐고 비웃지들 마시라. 월급생활자의 로망이란 한계가 있는 법이다. 그렇다. 난 패셔너블하지도 않은 주제에 패션 신불자의 수순을 밟고 있다. 이십대 중반까진 상하의 각각 두 벌로 한 계절 나면서도 기죽거나 남 부러운 적 한 번 없었다. 주머니에 땡전 한 푼 없는 날도 많아 별명은 천년빈대 만년식객.’ 그러나 사회생활이랍시고 만나는 사람들에게 눈총 받기 싫어 TPO별 아이템을 구비하고, 이젠 또 나이가 있으니 너무 허름한 차림새는 곤란하다 싶어 철마다 의복을 개비하고, 사람 기분이란 게 만날 다른데 스타일은 어떻게 하나겠냐며 이것저것 시도하다 보니 또 옷장이 미어지고, 쇼핑 한 번 할 때 제대로 하자 싶어 잡지도 보고 시장조사도 했더니 세상에 예쁜 건 또 왜 이렇게 많아? 그리하여 내 인생 이 지경이 된 거다.

20년 전 담배를 끊은 어느 중년 아저씨가 최근 했다는 말. “난 담배를 끊은 게 아니다. 단지 20년 동안 참고 있을 뿐이다.” 그러매 생각컨대, 한번 맛 들이면 절대 끊을 수 없는 것 네 가지는 담배와 마약, 고기, 그리고 쇼핑이더라. 이젠 다시 상하의 두 벌로 한 철 버티는 삶으로 돌아갈 수 없으니, 어쩌면 난 남은 평생 카드 회사와 패션 브랜드들을 먹여 살리기 위해 소처럼 일해야 할지도 모른다. 아직 통장에 현금이 있고 여차하면 장사 밑천으로 쓸 전세보증금이나마 남았을 때 대책을 마련해야 한다, 요런 절박함이 요즘 부쩍 자주 엄습한다. 아예 지름의 끝을 보자, 라는 건 현재 찾은 유일한 해법이다. 물론 전제는 비싼만큼 오래오래 질리지 않는 물건이어야 한다는 거다. 그러니까 샤넬백, 니가 클래식이든 사치품이든 이젠 상관없어, 가보자 갈 때까지.

p.s. 샤넬 매장을 지척에 두고 아직 출동하지 않은 단 한 가지 이유는, 혹시 지름의 끝이 내가 상상하는 그런 경지가 아님 어쩌나 하는 일말의 두려움 때문이다. 샤넬백으로도 마크와 클로에의 결핍이 주는 공허를 달래지 못하면? 내 평생 남은 모든 간절기 코트와 맞바꾸기로 한 버버리의 베이지색 트렌치 코트도, 같은 이유로 아직 지르지 못했다. 남미 두어 개국 여행 예산과 맞먹는 그 아이템들을 훅 지르러 나서기 전에 누군가 무릎을 탁 칠만큼 타당한 이유로 나를 설득해준다면, 차라리 뉴욕 모든 매장에서 그 아이템들이 품절이면, 아니 내일 아침에 길을 나서다 눈먼 돈가방이라도 줍는다면 좋겠다. 뭣보다 큰 바람은, 돈 버는 게 딱 쓰는 것만큼만 쉬웠음 좋겠다는 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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ibm x31. 벽돌, 아니죠~. 노트북, 맞습니다~.

머리 끝부터 발 끝까지 샤넬로 휘감은 여자는 권위를 중시하고 클래식을 사랑하는 업타운 레이디고, 디올이나 돌체 앤 가바나를 입은 여자는 화려하고 섹시하며, 비비안 웨스트우드는 자유분방한 펑크걸의 아이콘이라는 식으로, 특정 패션 브랜드들은 그것을 소비하는 자체만으로도 사람들의 이미지를 고정시키고 범주화하는 역할을 한다. 어디 패션만 그렇겠나? 청담동에서 8천원짜리 커피를 마시는 여자와 커피빈 쿠폰을 열심히 채우는 여자와 지하철 자판기 커피를 마시며 위생을 걱정하지 않는 여자, 그리고 '궂은 비 내리는 날 그야말로 옛날식 다방에 앉아' 맥심 커피를 마시는 여자에 대한 타인들의 시선은 모두 제각각이며, 우리의 소비는 때로, 아니 대부분, 제품 자체의 질보다 그런 시선과 이미지에 좌우된다.

제품에 대한 정보나 식견, 취향이 부족할 때, 타인의 시선과 이미지라는 요인은 보다 노골적으로 소비자의 선택에 영향을 미친다. 시선과 이미지에 신경을 쓴다는 것은, 정치의 'ㅈ'자도 모르지만 돈 많고 보수적인 아저씨들은 한나라당을 지지하고 왠지 반골 기질 있는 아티스트들은 민노당을 지지하기에 '그럼 나도 민노당' 해버리는 것과 비슷하게, 특정 제품의 소비자 그룹이 가진 특성과 가치관에 동조하는 행위이기도 하다. 강남에서 인천까지 먼길을 달려 업어온 나의 ibm x31을 보고 일명 '소니빠'인 언니가 혀를 끌끌 찰 때 내가 의연할 수 있었던 것도, 컴퓨터라곤 워드와 인터넷밖에 할 줄 모르는 내가 그 물건에 대한 뭔 소신이 있어서라기 보다, 언니 표현을 빌면 '신소재 건축 마감재' 혹은 '시커먼 벽돌'처럼 생긴 x31을 '명품 노트북'이라고 추켜세우는 해당 유저들의 성향에 깊이 매료되어서다.

컴퓨터 중고 장터를 보면 불량화소나 외관상의 흠집 하나에 가격이 뚝뚝 떨어지고, 어디 금간 데라도 있으면 당장에 고물 취급을 하고, 성능과 하등 관계 없는 박스 보관 여부로 판매자의 성의를 가늠하곤 한다. 하지만 ibm 유저들은 담대하다. '상단 배젤에 크랙 있습니다.' '액정에 5cm 정도 흰 멍 있습니다.' '자판 번들거림 있습니다.' 정도 멘트는 인사성으로 오가고, 마티즈를 스포츠카로 튜닝하는 자동차 광들처럼 구형 노트북에 총력을 기울여 듣도 보도 못한 사양으로 업그레드 해놓고 자기들끼리 감탄하며 신형 노트북 맞먹는 가격에 사고 팔기 예사다. 유저들 중에 유독 공대생이나 연구원들이 많고, ibmmania 사이트 같은 곳에서 이따금 여성 회원이 발견되면 8차선 고속도로로 뛰어든 멸종위기생물이라도 되는 양 호들갑을 떠는 것도 왠지 신뢰를 더하게 했다. 진료는 의사에게, 약은 약사에게, 컴퓨터는 '공돌이'에게, 라는 게 나의 철학이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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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티브 잡스가 신제품 발표회 때 서류봉투에 담아와 화제가 된 맥북 에어.


'내건 다 예뻐야돼'라는 친절한 금자씨 마인드인 언니는 한동안 '소니빠'를 지향하다 지금은 '애플 맥북 에어'에 꽂혀 호시탐탐 기변을 노리고 있다. 반면 '기계는 기계다워야 한다' 주의인 나는 43만원에 구입한 중고 노트북을 '까짓 깨질 테면 깨져라' 하고 케이스도 없이 가방에 넣어다니며 막 굴리고 있다. 언니는 백화점에서 200만원이나 주고 덜컥 구입한 소니 노트북의 용량이 적어 짜증난다며 나의 100만원짜리 중고 후지쯔를 마르고 닳도록 빌려 쓰던 것처럼, 앞으론 맥북 에어를 관상용으로 모셔두고 x31에 묻어가려는 모양이다. 

어느 ibm 유저는 새 노트북을 사서 과사무실에서 뻐기듯 꺼냈더니 여자 후배가 "선배, 노트북 바꿀 때 됐나봐요?" 그랬다고 한다. 이해한다. 단순하다 못해 투박한 ibm의 디자인은 아무리 봐도 여자들이 좋아할 스타일은 아니다. ibm 노트북을 쓰는 여자, 지금껏 주변에서 딱 두 명 봤다. 그 중 한 명은 패션 에디터였는데, 공대 나와서 연구소 다니는 남편의 추천이라고 했다. 난 그녀가 원피스에 모피 코트를 입고 사무실에 앉아서 시커먼 ibm 노트북을 상대하는 모습이 늘 보기 좋았다. 예뻐야 할 건 예쁘게, 튼튼해야 할 건 튼튼하게, 옷은 옷답게, 기계는 기계답게, 그 마인드가 맘에 드는 거다. 그러니까 ibm 노트북을 중고로 사는 여자라고 해서, 칙칙한 괴짜일 거라 상상하면 곤란하단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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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회생활을 끊고 동면 중인 처지라 발품 팔며 쇼핑 다녀본 지 오래됐다.
과로와 욕구불만 때문에 급사 직전에 이른 동료들의 응급처치용 쇼핑 행각에 말려들어 지난 12월 상콤하게 질러주었던 네 벌의 원피스를, 집밖에 나갈 일도, 만날 사람도 없단 이유로 아직 개시조차 못했을 정도.
하지만 '한 번 커진 씀씀이는 직장이 없어졌다고 다시 줄지 않는다'는 소비량 보존의 법칙에 따라, 요즘은 옷이나 장신구 대신 가구 구입에 열을 올리고 있다.

집은 다세대 주택의 12평짜리 분리형 원룸.
인테리어의 컨셉트는 마지 못해 블랙&화이트(가장 유행 안 타고, 싸면서 싼 티 덜 나고, 세트로 안 사도 대충 짝을 맞출 수 있기 때문).
가장 큰 미션은, 온 집안에 중구난방 굴러다니던 잡동사니들을 정리해서 발디딜 공간을 만들자는 것.
그리하여 지른 것들은...

1. 이케아 billy 책장. iikea.co.kr에서 개당 94200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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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립하고 세우는 데 개당 30분이면 오케이.
오래오래 쓸 도장 제품을 사고 싶었지만 30만원쯤 예산 차가 나서 눈물 머금고 이 녀석들로 결정. 
싸구려 같아 보이면 어쩌나 고민했지만, 학생 시절 구입해 10년째 사용 중이던, 체리색 시트지가 발린 펄프 책장과는 비교도 할 수 없게 튼튼하다.
책은 색깔별, cd는 국적별, 만화책은 사이즈별, 비디오와 dvd는 선호도순...이라는 제 멋대로 정렬 방식.
책장 폭이 넓은 편이라 무거운 것을 얹으면 휠 것 같은데, 선반을 뒤집어 쓸 수 없다는 게 아쉬운 점이다.
tip: 도장 가구란 페인트나 안료로 칠을 했다는 건데, 품질은 좋지만 호시탐탐 큰 집 얻어 이사갈 궁리만 하는 원룸족들이 쓰고 버려도 좋을 용도로 구입하기엔 꽤나 값들 나가주신다. 대부분 원룸에선 시트지를 붙인 저렴한 가구를 사용하는데, 시트지의 질이며 바르는 공법 같은 것들이 가지가지인 모양이다. 최근 화이트 서랍장을 하나 구입했다가 표면이 너무 미끄러워 도무지 먼지를 닦아낼 수 없는데다 군데군데 시트지가 울기까지 해서 반품한 경험이 있다. 반면 billy씨는 먼지도 잘 안 묻고, 청소도 쉽고, 보기에도 번듯한 편.

2. 블랙 캐비넷, gagubada.net에서 각 10만원, 14만5천원(모두 색상 변경 때문에 2만원 추가된 가격).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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옷장&서랍장 대용으로 구입했다. 업체에 전화해서 색상을 변경할 수 있다.
왼쪽 캐비넷은 안에 5칸의 선반이 있는데, 옷이 말도 못하게 많이 들어가며 서랍장에 비해 옷을 넣고 꺼내기도 쉽다.
오른쪽은 왼쪽과 같은 사이즈에 선반 대신 봉이 달린 옷장형 캐비넷을 사려다 사이즈가 안 맞아 선택한 2인용 옷장.  
옆에 보이는 2단 스탠드는 3년 전 집들이 선물로 받...았다기 보다 손님들에게 반강제로 뜯어낸 이케아 제품. 업라이트쪽은 밝기조절이 가능하다. 튤립 같이 생긴 아래쪽은 자유자재로 꺾어져 편리한 데다, 마이크 대용(??)으로도 쓸 수 있다.
커튼은 얻은 것이라 길이가 맞지 않는다. 하지만 화이트니까 일단 오케이.

책장과 캐비넷을 넣고 한 동안은 뿌듯해서 밥 안 먹고도 배불렀다.
그러나 차츰 들려오는 악평들.
"큐티나 오렌지 같은 일본 인테리어 잡지에 나오는 조잡한 오타쿠의 방 같아."
"여기 기숙사예요? 가정집으로 캐비넷 배달해본 건 첨이라..."
"뭔가...균형이 안 맞아. 갓 이사온 집 같아."

젠장. 젠장. 젠장.
다시 고민에 빠졌다.
이 사태를 수습하려면 도대체......뭘 더 사야 하지?
Posted by 알 수 없는 사용자

1. 12:00 논현동. 오십년 만에 이산가족을 만나도 "안 죽고 살아줘서 고맙다"며 끌어안고 오열하는 대신 "그 옷 어디서 샀냐?"며 대뜸 라벨부터 뒤집어 볼 게 분명한 잡지판 사람들이 한 트럭쯤 몰려들기로 예정된 결혼식.
2. 14:00 신사동. 혹여 내가 결혼이라도 하는 날엔 "신부가 성질 더러운가봐. 하객이라곤 회사 사람들 뿐이야"라는 시댁 뒷담화를 면하게 해줄 한줌 대학 동창들과 1년만에 잡힌 커피 약속.
3. 16:00 홍대. 일하다 친구가 되어 이제 나와는 연애 문제로 속앓이할 때 뇌가 엿가락이 되도록 같이 술을 마셔주는 관계인, 그러나 그들끼리는 서로 모르는 두 지인을 소개시켜주기로 한 저녁 식사 자리.
4. 21:00 W호텔. 동료들과 스테판 폼푸냑 내한 공연 겸 파티에 참석한 후 룸으로 옮겨 파자마 파티.

지난 토요일, 전혀 성격이 다른 네 개의 약속이 잡혔다. 네 자리를 몽땅 아우르긴커녕 당장 결혼식용 의상도 없다. 작년에 스텔라 맥카트니 for H&M 한 시즌 옷을 몽땅 개인소장용으로 매입했다는 한 친구도 막상 입으려면 옷이 없다며 한숨을 짓곤 했지만, 내 경우는 입고 죽을래도 진짜 옷이 없다. 1년 365일을 청바지에 티셔츠 쪼가리, 뻔뻔한 노메이크업으로 일관하는 나로선 그나마 트렌드가 나를 쫓아와 "너의 스타일은...네오 프렌치 시크라고 해두지"라는 격려라도 간간이 듣게 된 게 고마울 정도다.

결국 비오는 금요일, 이태원으로 쇼핑을 나섰다. "그래, 넌 뭘 사고 싶은데?" 이태원 시장의 아주머니들이 그녀 얼굴만 보고도 몇 만원씩 척척 깎아주는 건 예사고, 단속에 걸릴까봐 꼭꼭 감춰뒀던 스페셜 '~st'를 좌르륵 펼쳐준다는, 그리하여 '이태원 MD'라는 별명이 붙은 친구가 묻는다. 글쎄, 뭘 사고 싶은가가 아니라 뭘 살 수 있는가, 혹은 뭘 입을 수 있는가 물어야 하지 않을까. "음, 살 건 너무너무 많지. 만날 청바지만 입는데 요새 다 마르고 닳아서 엉덩이가 시원해. 살이 쪄서 맞는 티셔츠도 없고. 연말도 다가오는데 데이트나 파티룩은 전무하지. 당장 급한 건 내일 입을..." 성격 좋은 이태원 MD는 닥치라고 소리치는 대신 조용히 택시 창밖으로 고개를 돌렸다. 비에 젖은 가로수들을 보며 잠시 상념에 잠긴다. '너희도 헐벗었구나. 꼭 나처럼.'

브라운 톤의 푸대자루형 원피스를 걸쳐 본다. '이건 W00 Bar 보다 구파발 관광 나이트에 더 어울리겠어. 골드 클러치 대신 대파가 삐죽 튀어나온 장바구니가 필수지.' 보풀보풀한 모직으로 된 새빨간 드레스를 힐끔 쳐다 보다 행여 들킬 새라 딴청을 핀다. '이건 완전 크리스마스 에디션이군. 홍대에 입고 가면 시선 제대로 받겠어.' 가슴께가 훅 파인 검정 새틴 원피스를 보며 군침을 흘리다가 정신이 번쩍 든다. '대학 동창(그것도 모두 남자)들이 날 발정난 노처녀로 보는 건 원치 않는단 말이다.'

다음 순간, 내가 무슨 옷에 시선을 주든 꿈쩍도 않고 묵묵히 쇼핑을 하던 MD가 한마디 한다. "너 그거 입어봐." 그때 내 손가락 끝이 닿아 있던 곳은 두툼한 모직 소재의 블랙 미니 원피스. 미니 스커트는 대학 시절 하숙집에 불이 나서 긴급 조달한 구호물자 중에 섞여 있기에 마지 못해 입어본 뒤로 처음이다. 하지만 지금은 겨울, 내겐 롱부츠가 있다. 게다가 옷은 상의 실루엣이 풍성해 나의 육덕진 몸을 용의주도하게 가려줄 테다. 가격도 저렴한 4만5천원. 결국 그것으로 낙점. 쇼핑은 사나이답게, 처음 입어본 옷, 친구가 찍어준 옷으로 단번에 고르고 끝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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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진출처 www.fashi.co.kr

<모직 소재 블랙 미니 원피스 + 검정 레깅스 + 검정 롱부츠 + 골드 이어링 + 스모키 메이크업>에 대한 토요일 사람들의 반응

1. 결혼식: 비비안 웨스트우드의 롱스커트를 입고 온 팀장. "나도 미니 스커트 입고 싶어. 저딴 계집애도 미니를 입는데 왜 난 롱스커트를 입었을까!"
2. 동창모임: 11년 동안 나의 온갖 허름한 모습을 다 본 동기 녀석. "야, 친구들 만나면 소문내줄게. 너 예뻐졌다고."
3. 홍대앞: 일동. "오오오. 왜 진작 이러고 다니지 않았어!"
4. W호텔: "이것은 라운지 파티 룩의 교본이야!"

그날의 교훈

1. 나 자신의 안목을 믿을 수 없는 관계로, 여러번 패션홀릭들과 쇼핑을 다니며 그들이 추천하는 대로 장바구니를 채워봤지만 이번만큼 성공적인 경우는 처음. 여성스러운 로맨틱룩을 고수하는 친구가 골라준 옷들은 민망해서 한번도 입지 못했고, 딱 내 취향의 매니시하고 실용적인 룩을 구사하는 선배가 골라준 옷들은 그녀의 초박형 몸에는 잘 맞을지 몰라도 굴곡 많은 내 몸에는 재앙이나 다름 없었다. 어느 쇼퍼홀릭은 내가 쇼윈도에 눈길만 던져도 "사! 사! 사버려!"라고 치어리딩을 해댔으며, 아무래도 내 취향은 아니지만 기껏 쇼핑을 도와달라고 모셔왔다가 거절하기 민망해서 누군가의 권유대로 산 옷들은 지난 여름 아름다운가게에 몽땅 기증했다. 좋은 옷을 고를 자신이 없다면, 좋은 옷을 골라줄 친구를 신중하게 고를 것. 2. 블랙 미니 드레스는 패션의 만병통치약이다, 라는 건 뻥이 아니었다. 장례식부터 파티까지 모두 응용가능. 3. 그냥 예쁘고 눈에 띄는 옷, 연예인 누가 입고 나왔다는 고급 브랜드 옷의 싸구려 카피본들을 마구 걸쳐도 좋은 건 이십대 초반까지다. 나이가 들면 저렴해 보이는가, 그렇지 않은가, 하는 문제가 쇼핑의 새로운 화두로 떠오른다. 실상 저렴하면서 그렇지 않아 보이는 옷들, 이태원 시장에 많더라.

Posted by 알 수 없는 사용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