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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 2008.03.08 <우연의 음악>: 연애와 사랑은 다르다 7 by 알 수 없는 사용자

마지막 날 밤에 그녀가 말했다.
"나는 당신이 나를 사랑하지 않는다는 걸 알아요. 하지만 그렇다고 해서 내가 당신한테 안 어울리는 여자라는 뜻은 아녜요. 당신은 자기 멋대로 하는 사람이니까 떠나야 한다면, 좋아요, 떠나야겠죠. 하지만 내가 여기 있다는 것만 기억해 둬요. 어쩌다가라도 누군가의 팬티 속으로 기어들고 싶어서 근질거리면 내 팬티를 맨 먼저 생각해요."
  - 폴 오스터, <우연의 음악>


: 저렇게 말할 수 있는 여자를 어떻게 생각해야 할까요.
그녀는 당신이 짐작하는 것보다 훨씬 더 대담하고 똑똑하다고? 저 태연한 선언 뒤에는 그렇게 '즉물적'이고 '굴욕적'(이라고 타이핑하는 순간, 나의 애정관, 혹은 남성관, 혹은 가장 거대한 욕구가 어떤 종류인지 백일하에 드러나는군요)인 대상으로 남는 한이 있더라도 그를 잃는 일만은 모면하려는 가여운 여자가 숨어 있다고? 그녀는 완벽하게 건조된 감정의 소유자이며, 그에게 바라는 것은 질척한 구애가 아니라 오직 단도직입적인 섹스 뿐이라고? 떠나는 발 뒤꿈치에 매달리고, 애정을 구걸하고, 끈끈한 눈물을 흘리고, 심장이 터져나갈 애정을 가감없이 보이는 짓이야 말로 남자를 도망치게 만드는 악행이라 믿는 그녀는, 실은 정치적이고 외교적인 유혹의 대가라고? 서랍 속의 검정 양말처럼 흔하디 흔해서, 하나쯤은 줄어도 상관 없는 섹스 파트너에게 될대로 되라는 심정으로 실험적인 화법을 시도해보는 초연한 여자라고? 실은 저런 여자는 이 세상에 존재하지 않으며, 그녀의 대사는 이 책을 쓴 폴 오스터가 남자이고, 그를 비롯한 이 세상 모든 남자들의 대뇌 어딘가에 아련한 판타지로 저장되어 있는 '그 무언가'를 직설적으로 꺼내놓은 것이라고?
글쎄. 난 잘 모르겠습니다.  

어른이 되자 연애는 더 이상 발렌타인 데이의 초콜릿처럼 달콤하지 않았습니다. 소녀 취향의 판타지와 그를 향한 단순한 열정은, 연애가 사랑의 동의어가 아니며 실은 상대에게서 내 욕망을 채우려고 끙끙대는 구차한 과정이라는 사실을 깨달으면서 자취도 없이 증발했지요. 사랑은 다분히 관념적입니다. 이를 테면 신(神)이나 정의, 공중도덕처럼, 존재한다는 사실을 증명하기보다는 그저 믿어주어야 하는 가치인 것이죠. 그러나 연애는 금요일 오후 7시의 영화 티켓이나 언 손을 덥히는 36.5도의 체온이나 인터넷으로 주문한 콘돔 상자처럼 촉감이 있는 현실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영원할 수 없어요. 그래도 연애는 사랑을 지향하리라 믿었습니다. 적어도, 그렇게 믿고 싶었던 것 같네요.



"나는 당신에게 돌아오겠다고 했소. 난 지금 약속을 한 거요."
"나도 당신이 약속을 했다는 거 알아요. 하지만 그렇다고 해서 당신이 약속을 지킬 거라는 뜻은 아녜요."
 
- 폴 오스터, <우연의 음악>



: 또, 또 이럽니다. '연애소설'과는 KTX 타고 네 시간 거리쯤 떨어져 있는 <우연의 음악>에서 고작 이런 구절이나 집어내다뇨. 사실 이 책을 읽은 지는 꽤 됐습니다. 동대문의 헌책방에서 '오늘 막 들어온 헌책'(묘하게 역설적인 표현 아닙니까?)이라며 주인 아저씨가 뻐기듯 내줬던 책이죠. 읽은 지는 2년쯤 되어서, 현실과 환상의 경계를 백일몽처럼 들쑤시던 그 얼개 사이로 또렷한 것은 이 몇 문장 뿐이네요. 책을 읽던 그 무렵 골몰하던 생각 때문이었겠죠. 2006년의 나는 생각했습니다. 세상이 달라졌고 사람들이 변했고, 그래서 연애의 풍경도 예전과는 다르지만, 그래도 그 달라진 껍데기 안에 도사린 본질만은 그대로라고요. 2006년의 나는 또 궁금했습니다. 대체 나는 네게서 무엇을 보고 무엇을 믿어야 하나? 무엇을 가져야지 나는 너를 온전히 가졌다고 안도할 수 있나? 그리고 2006년의 나는 머리가 아팠습니다. 연인에게서 갈망하는 것은 1986년이나 2006년이나 조금도 달라지지 않았는데, 이제는 내 진심을 보이는 것조차 전략과 전술이 되어 피 튀기는 연애의 전장을 이리저리 헤매야 하는 기분이었으니까요. 그때의 나는 이렇게 썼습니다. "'너만을 원한다'는 허물어진 고백보다는 섹스 후의 '즐거웠어, 그럼 안녕'이 쿨하고, '이제 너를 너무 사랑해서 나도 어쩔 수가 없어' 같은 끈끈한 호소는 그를 지구 반대편으로 도망치게 만들 거라는 강박. 밀었다가 당겼다가, 조였다가 풀었다가, 감추었다가 보여줬다가…를 반복하는 감정적인 첩보전이 연애란 말인가. 정말 그런 건가."       

2008년의 나는 생각합니다. 그것도 한 때구나. 조지 버나드 쇼는 “사랑은 두 사람이 서로 다른 점을 과장하는 흥미로운 과정”이라고 말했다는데, 그렇다면 연애는 두 사람이 서로 다른 점을 은폐하는 과정인 것 같습니다. 그 은폐에 지치거나 심드렁해지면 연애도 끝이 나겠죠. 그러니 연애가 언제나 사랑을 지향하는 건 아닌 셈입니다. 씁쓸하지만 받아들이기로 해요. 세상에는 불가항력이라는 것도 있으니까.



* <W KOREA> 2006년 3월호에 이 글의 일부가 실린 적이 있습니다. 하지만 이 글을 쓴 사람은 어쩐지 그때와는 꽤나 다른 사람이 된 것 같네요.

Posted by 알 수 없는 사용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