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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 2008.01.11 공항에서 급수습하는 영화들 10 by marsgirrr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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언니들, 뜨지 말고 그냥 살아!


한국영화 속 사랑의 결론은 '죽거나 떠나거나' 둘 중 하나다. 한동안 여자배우 살아 있는 꼴 못 보는 감독들이 각종 질병을 검토해 '시한부' 딱지를 붙여댔다. 21세기 들어서는 여자 주인공 죽이는 게 너무 진부하다 생각했는지, 조폭 남자 주인공들이 우르르 등에 칼을 꽂았다. 이젠 웬만한 뮤직비디오도 다 따라할 만큼 닳고 닳은 설정이 되어 버렸지만, 어쨌든 심심하면 한국영화가 써먹는 수법이다. 죽거나 떠나거나.

그런데 2007년 연말, 이 '죽거나 떠나거나'에 새로운 트렌드가 만들어졌다. 사랑을 쫓다 지친 여자들이 외국으로 뜨기 시작한 것이다. 일본에서 한번쯤은 케이크 먹고 미니홈피에 기념사진 올리는 게 대세인 지금, 선남선녀들의 가장 큰 희망은 '유학'과 '여행'이다. 트렌드를 나름 제대로 반영했다는 평을 받았던 <싱글즈>에서 이미 이런 욕망이 등장했었다. 미래가 안 보이는 주인공 나난에게 월 1,000만원짜리 남자가 접근하더니 같이 외국 유학을 가자고 꾄다. 하지만 그렇게 남의 덕에 먹고 살면, 씹던 껌처럼 자기 친구를 차버리는 싸가지 없는 20대 명품족 여자애와 동급이 될까봐 마음을 접는다. 그리고 서울에서 친구와 '으샤으샤' 새로운 인생을 시작한다는 희망찬 청춘 스토리였다. <싱글즈>의 후예들은 어떠한가. 일단 <용의주도 미스신>을 보자. 요즘 야근 1순위 직업인 광고 AE가 어찌하여 남자 넷을 만날 시간을 빼냈는지 미지수지만, 어쨌든 주인공 한미수는 남부끄럽지 않은 남자 만나 남부끄럽지 않은 미래를 설계하고자 한다. 그러나 관계가 꼬이고 꼬여 결국 남부끄러운 상황에 봉착한다는 내용. 그리고 파리 유학을 간다나, 어쩐다나. 남자와 일 앞에서 악착같이 굴던 캐릭터가 '너 자신을 알라'란 충고 한마디에 어찌 이렇게 무너질 수가 있을까?


한예슬과 쌍벽을 이루는 21세기 한국미인 김태희도 <싸움>에서 한국을 뜬다. 결벽증 남편과 이혼한 뒤 공격을 받아온 그녀는 분노를 참지 못하고 계속 싸움에 휘말린다. 싸움 잘 하는 만큼 독립 의지도 강하다. 유리공예가인 그녀는 한 타임에 3,000만원이상 매출 나야 방송 가능하다는 홈쇼핑까지 출연해 물건을 판다. 공예가가 이 정도 인지도가 생겼다면 성공한 것이 아닌가. 그런데 화재로 작품을 잃고 설상가상으로 전남편과 죽을 듯 싸우고 난 뒤, 속세에 미련을 버렸는지 바로 뉴욕 유학을 준비한다. 유학을 떠날 거면 러닝타임 내내 프로페셔널 아티스트인 양 펼쳤던 노력은 뭐였을까? 가진 자의 아르바이트?


커리어우먼만 한국을 뜨는 것도 아니다. 하다못해 <색즉시공 시즌 2>의 여자 주인공은 대학도 마치지 않고 결혼한답시고 한국을 뜬다. 가진 것 없고 어리바리한 남자친구와 헤어질 수는 있다. 그런데 왜 꼭 마음에도 없는 부잣집 도련님에게 안겨 원치도 않는 미국행을 택하는 것일까? 그게 성공이라고 생각하는 것일까?

사실, 결말을 무조건 '공항'에서 수습하려는 방식은 게으른 거다. 물론 젊은 세대가 공항을 심하게 사랑하긴 하지만, 모든 개연성을 무시하고 공항만 보면 히죽거릴 만큼 헤프진 않다. 남자한테 채였다고 바로 유학을 선택하진 않는단 말이다. 여행이라면 모를까. 좋든 싫든, 오랫동안 자리 잡았던 조국을 뜨기 위해선 고민에 고민을 거듭해야 한다. <용의주도 미스신>과 <싸움>과 <색즉시공 시즌 2>의 여자들은 심지어 고민을 나눌 친구도 없다(제작비가 모자라서?). 여자들이 유학에 대한 판타지를 가지고 있는 건 사실이다. 결혼문제 등등에서 벗어나 나이 초월해 자유롭게 살고 싶다는 바람인 거다. 하지만 판타지는 이룰 수 없어서 판타지다. <용의주도 미스신> <싸움> <색즉시공 시즌 2>처럼 간편하고 쉽게 이룰 수 있다면 애초부터 꿈꿀 거리 자체가 못된다. 한국영화들, 쓸데없는 판타지 양산 말고 한국에서 잘 사는 방법이나 찾아보라구!


* 이글은 지면에 실린 글을 옮긴 것입니다.

Posted by marsgirrrl