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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 2008.03.19 <보르헤스에게 가는 길>: 대문호는 대체로 귀엽기 마련인가 10 by 알 수 없는 사용자
읽은 건 죄다 복사하듯 기억하던 시절도 있었건만, 요즘은 조금 전에 읽은 구절조차 까맣게 잊어버리곤 합니다. 기억력이 흐려진 건지, 알코올이 드디어 대뇌의 주름 사이사이까지 알뜰하게 절인 건지, 아니면 오만가지 비루한 생각이 섞어찌개처럼 머릿속에서 들끓고 있기 때문인건지, 잘 모르겠습니다. 이유야 뭐가 됐건 무슨 상관입니까. 나는 노화를 겪고 있거나(기억력 감퇴), 문학과 인생에 대해 논하며 - 죄송합니다. 실은 '남자'와 '야구'에 대해 떠들며 - 권거니 잣거니 술잔을 기울이는 시절도 이제 막장이거나(알코올 부작용), 멸종 위기 동물 보호나 부시 암살 같은 건설적인 고뇌는 뒤로 미룬 채 먹고 사는 문제에만 골몰하는 자잘한 마음의 도시월급생활자인 겁니다. 뭐, 껄껄 웃으며 강남대로를 뛰어다닐 만큼 기쁘지는 않군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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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보르헤스에게 현실의 정수는 책 속에 있었다. 책을 읽고, 책을 쓰고, 책에 대해 이야기하는 것이 그 알맹이였다. 그는 수천 년 전에 시작돼서 한 번도 끝난 적이 없는 대화를 이어가고 있음을 본능적으로 인식했다. 책은 과거를 복원했다." 
- 알베르토 망구엘, <보르헤스에게 가는 길>


말도 마십쇼. 이 구절이 생각이 안나서, 책을 읽다 말고 세 번이나 다시 들춰봐야 했지 뭡니까. 알베르토 망구엘이 그러는데, 보르헤스는 실수로라도 뭘 잊어버리는 법이 없었대요. 백과사전부터 온갖 소설의 묘사, 수수께끼, 경구, 이탈리아의 장시, 오래된 탱고의 가사까지, 읽은 건 구체적인 구절을 암송할 정도로 모두 기억했다는군요. 정작 본인이 쓴 책은 단 한권도 집에 두질 않았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자신이 쓴 모든 문장을 남김없이 기억했다고도 하고요. 심지어 낯선 책방에 가더라도 책 등 한 번 쓰다듬어 보고 그 내용을 단박에 알아챘다고 합니다. 아, 말 안 했던가요? 보르헤스는 쉰여덟에 완전히 실명했습니다. 그리고 열여섯 살짜리 알베르토 망구엘이 저녁마다 책을 읽어주던 무렵에, 보르헤스는 이미 예순다섯이었습니다. 앞이 보이지 않는 보르헤스는 구술해줄 만한 사람이 나타날 때까지 마음 속으로 한 줄씩 문장을 썼고, 완성된 문장을 소리 내어 불러줄 때가 되면 완벽한 '글'을 막힘 없이 토해냈다고 합니다. 정말이지 대단하지 않습니까? 그러니 1964년부터 1968년까지 보르헤스와 함께 책을 읽고, 그가 불러주는 시를 받아 적었던 알베르토 망구엘은 뭐가 돼도 돼야하지 않겠습니까? (결국 이 사람은 '세계적인 독서가이자 저술가'라는 거창한 존재가 됐습니다. 책을 엄청나게 읽고 책 읽은 얘기를 쓰는 부러운 직업이랄까요. 내 방 책장에는 그가 쓴 <독서의 역사>라는 두꺼운 책이 꽂혀 있습니다.)

눈을 또록또록 뜨고 무엇이든 읽고 쓸 줄 아는, 그래봐야 겨우 서른 언저리인 나는 생각합니다. 난 대체 뭐가 문제인거냐. 하지만 닥치는대로 읽고, 또 어깨에 앉은 비듬 털어내듯 시원하게 잊어버리면서 다시 생각합니다. 우주를 떠도는 '기억력 에너지'란 게 있다면 말이죠, 보르헤스나 망구엘 같은 사람이 있기 때문에 나 같은 사람도 존재하는 것이 아닐까요. 그래야 우주 전체의 기억력 에너지가 일정하게 유지될 거 아니겠어요? 기억과 망각이 고르게, 공평하게, 민주적으로다가. (...라고 썼지만, 실은 헛소리 같습니다. 생각해봤는데 아무래도 술 때문이에요.)    

이쯤에서, 이 책의 권말에 수록된 '보르헤스 어록 사전'을 소개합니다. 읽으면서 깔깔 웃거나 무릎을 탁 치던 순간이 꽤 여러 번 있었는데, 역시나 책을 덮고 나니 머릿속이 참 휑합니다. 기억나는 것이라고는 '보르헤스 이 양반, 참 귀여우시구나' 하는 감상 밖엔. 무슨 말인지는 아래의 발췌한 부분을 읽어보면 아실 겁니다. 그리고 구절구절 총기 있게 잘 기억해두셨다가, 어느 날 어디선가 "보르헤스 어록... 사전이었던가?"를 웅얼거리며 쩔쩔매는 삼십대 여인을 발견하시면 슬그머니 다가와 귓속말로 일깨워주시면 감사하겠습니다.  



갖는다는 것: 쇼펜하우어는 우리가 가지고 있는 것이 우리를 행복하게 만들 수 없지만, 우리에게 부족한 것은 분명히 우리를 불행하게 만든다고 말했다. 가령, 어금니 통증으로 고통받는 사람은 그렇지 않은 사람들이 행복할 것이라고 생각하는 오류를 범한다. 사랑받지 못하는 것과 병에 걸리는 것은 어금니 통증의 또 다른 형태이다.

노벨상: 나는 영원히 미래의 노벨상 수상자가 될 것 같다. 아마도 그것이 스칸디나비아의 전통인 것 같다.

도서관: 도서관을 정리하는 것은 아무 말 없이 비평을 하는 행위다.

무용(無用): 나는 기린의 목이 너무 길다고 불평할 수 있지만, 그렇다고 그것이 기린의 모습을 바꿀 수는 없다.

무인도: 사람들에게 무인도로 가져갈 책이 무엇이냐고 물으면, 대개는 <돈키호테>라고 대답한다. 그러나 20일간의 휴가를 갖게 되면, 그들은 아무 책도 가져가지 않는다.

민주주의: 매우 널리 유포된 미신. 통계의 남용.

믿음: 나는 믿음을 가지고 있는 사람들이 특별하게 행복하다고 느끼지 않는다는 것을 알았다. 반대로 그들은 근심으로 가득 찬 세상에서 살고 있고, 하느님의 정의에 대해 끔찍한 두려움을 가지고 있으며, 그것도 모자라 받을 자격도 없는 상이나 벌을 기다린다.

보수주의: 보수주의자가 된다는 것은 정치적으로 회의주의자가 되는 것이다. 즉, 우리가 실수할지도 모르기 때문에 사물들을 바꾸려고 하지 않는 것이다. 우리가 살고 있는 세상은 그리 정의롭지 않지만, 다른 세상은 또 다른 형태의 부정(不正)이 될 수도 있다. 이것 외에도, 보수당은 광신(狂信)을 만들 수 없다는 장점이 있다. 우리는 광적인 민족주의자, 광적인 자유주의자, 광적인 공산주의자가 될 수 있다. 그러나 광적인 보수주의자가 될 수는 없다. 보수주의자가 된다는 것은 인내와 체념을 요구하기 때문이다.

복수: 복수는 아무 소용도 없는 것이며, 잔인하고 황당한 것이다. 진정한 복수는 망각과 용서다.

비행기: 비행기 회사는 공포를 조성하는 전문가인 것 같다. 비행기를 타면 우리는 "산소마스크가 얼굴 위로 떨어질 겁니다." "즉시 담배를 꺼주십시오." "구명조끼를 입고 공기를 넣으십시오"와 같은 말을 들을 수 있다. 하지만 당신이 기차를 탄다면, 기차가 충돌할 것이라는 말을 절대로 들을 수 없을 것이다.

서명: 나는 내 수많은 책에 서명을 했다. 그러므로 내가 죽게 되면, 내 서명이 없는 내 책이 훨씬 큰 값어치를 지니게 될 것이다.

선물: 사람들은 내 책을 구입하지만 읽지는 않는다. 그런데 왜 내 책을 살까? 한참이 지난 후에야 나는 내 책이 선물로만 사용된다는 사실을 알았다.

영향: 나에게 영향을 끼치지 않은 작가는 하나도 없다. 비록 내가 그들을 읽지 않았고, 내가 좋아하지 않는 작가라고 해도 말이다. 그러나 한 사람만을 선택하라면, 나는 주저하지 않고 체스터턴을 택할 것이다. 물론 버나드 쇼가 그보다 훨씬 훌륭한 작가이다. 하지만 우리는 우리가 모방하길 원하는 작가를 모방하는 것이 아니라, 우리가 모방할 수 있는 작가를 모방하는 것이다.

자살: 헤밍웨이는 스스로 목숨을 끊었다. 그것은 자기가 위대한 작가가 아님을 깨달았기 때문이다. 바로 이것이 그의 작품을 부분적으로나마 구원한 요인이다.

작위: 아마도 모든 장르 중에서 가장 작위적인 장르는 탐정소설일 것이다. 죄는 합리적 사고에 의해 들춰지는 것이 아니라 고발이나 밀고에 의해서 밝혀지기 때문이다.

잠자기: 잠을 자면 자신에 관해 잊게 된다. 그러나 잠이 깨면 자신을 기억한다.

젊음: 언젠가 누가 나에게 이렇게 물었다. "현대 시인들에 관해 어떻게 생각합니까?" 그러자 나는 이렇게 대답했다. "아주 젊은 시인이 있는데, 이름이 베르길리우스라고 하지요. 정말 전도유망한 청년입니다."

제안: 나를 비방하는 글들을 읽을 때마다, 나는 그런 감정을 공유할 뿐 아니라, 심지어 더 나은 방법으로 날 비난할 수도 있었을 것이라고 생각한다. 아마도 앞으로 있을 자의 적들에게는 그들의 비평을 출판하기 전에 나에게 보내라고 충고해야만 할 것 같다.

죽음: 만일 불멸이 존재한다면, 죽음이란 장난이다.

직업: 시인은 자신의 직업이 감정을 표현하는 것임을 알고 있는 사람이다. 그러나 자기가 남에게 충고해줄 수 있는 사람이라고 생각한다면, 그것은 큰 실수다.

타고르: 분명한 사기꾼이며, 스웨덴의 고안품. 그는 형편없는 시인이며, 장점이라고는 천국의 튜닉을 입은 것밖에 없다.

필요성: 우나무노는 불멸을 제시하지 않는 신은 믿을 수 없다고 썼다. 하지만 난 그렇지 않다고 생각한다. 내가 계속 목숨을 부지하길 원치 않거나, 우주가 나를 필요로 하지 않는다고 생각할지도 모르는 신이 존재할 수도 있다. 어쨌건 신은 내가 태어난 1899년까지 나를 필요로 하지 않았다.

하느님: 우리를 사랑하는 전지전능한 하느님이 있다는 생각은 환상문학의 가장 위대한 고안이다. 그러나 나는 하느님에 관한 생각이 리얼리즘 문학에 속한다면 더욱 좋을 것이라고 생각한다.

협박: 죽이겠다는 협박 이외에 다른 형태의 협박이 있을 수 있을까? 누군가를 불멸로 만들겠다고 협박하는 것은 아마도 매우 흥미롭고 독창적인 협박일 것이다.

확장: 쟁기와 칼은 손의 확장이다. 소우주는 눈의 확장이다. 그러나 책은 그 이상이다. 책은 기억의 확장인 것이다.
Posted by 알 수 없는 사용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