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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 2008.01.16 <레볼루션 No3>: 생각할 수록 웃기는 농담 3 by 알 수 없는 사용자

그날, 망키는 기분이 몹시 안 좋았다. 배구공을 발로 차고 있는 현장을 목격한 망키는 "배구공은 축구공이 아니다"라는 이의의 여지가 없는 정론을 내세워 우선 우리들의 뺨따귀를 갈겼다. 그리고 'S코의 방'이라 불리는 체육 주임실로 우리를 끌고가, 정좌를 하게 한 상태에서 토킹을 세 방씩 먹였다. 그 토킹이 적중하면 대개 으윽, 끄윽, 허억, 컥, 하고 만화의 말풍선 같은 신음을 토하는데 순신은 달랐다. 코로 황소 같은 숨을 내뿜을 뿐 절대로 소리를 지르지 않는다. 망키는 그게 또 마음에 들지 않아 순신만 일으켜 세워 따귀를 다섯 대 올려붙였다. 순신의 몸은 꿈쩍도 하지 않았다. 망키는 속이 부글부글 끓어 "과연 조선 놈이 질기군"하고 조롱하듯 말했다. 순신은 그 말에 피식 웃음으로 대답했다. 그런데 순신이 정좌하고 있는 친구들의 줄로 돌아가려고 등을 보였을 때 망키가 그 등에다 대고 "이런 겁쟁이 같은 자식"하고 폭언을 했다. 망키는 실수를 했다. 순신의 눈꼬리 흉터가 순간적으로 빨갛게 물들었다. "배구공이 축구공이 아닌 것"처럼, "순신은 겁쟁이"가 아니다. 순신이 다닌 민족학교에는, '겁쟁이'라는 소리를 듣고서 싸움을 하지 않으면 반드시 왕따를 시킨다는 불문율이 있어, 그 소리를 들으면 조건반사적으로 펀치가 나갈 수밖에 없도록 성장한다.

그런 사연이 있으니, 뒤를 돌아본 순신은 망키의 아래턱에 묵직한 라이트 훅을 퍼부었다. 삼반규관이 순간적으로 마비된 망키는 평행감각을 잃고 무릎을 꺾었다. 순신은 정수리 머리카락을 움켜잡고 망키를 억지로 일으켜 세워, 이번에는 코를 표적으로 펀치를 날렸다. 퍽, 하는 소리가 나면서 코가 뭉개지자 순신은 표적을 바꾸어 신장 부근을 난타했다. 망키는 완전히 의식을 잃었고, 코에서는 피가 쿨럭쿨럭 쏟아져나왔다. 나는 때를 가늠해 말리려고 끼어들었다. 다른 친구들이 망키를 양호실로 데리고 가는 동안, 순신은 교실 의자에 고개를 푹 숙이고 앉아, 울음 섞인 목소리로 내게 말했다.


"전부 다, 물거품이 됐어."


<명상록>도 <선의 연구>도 <에크하르트 설교집>도 오트의 <성스러운 것>도 벤야민의 <폭력비판론>도, 모든 것이 망키의 한마디에 순신의 머리에서 날아가버리고 말았다. 나는 순신의 어깨를 툭툭 두드리면서 말했다.


"다시 읽으면 되잖아."


- 가네시로 가즈키, <레볼루션 No.3>

사용자 삽입 이미지

제가 읽은 책은 이 표지가 아니었습니다. 재출간의 은혜가 가네시로 오라버니를 굽어 살피셨군요.



: 혹시 주변에 이런 사람이 있습니까? 험상궂게 생긴 <개그콘서트> 마니아, 그래서 무뚝뚝한 얼굴로 각종 최신 유행어를 구사하는 남자, 그런데 그게 농담이라는 걸 아무도 몰라주는 남자, 그래도 굴하지 않고 김구라 성대모사를 시도하는 남자, 그런데 다들 "이게 뭐야~"가 시비 거는 말인줄 알고 사색이 되고, 결국 맥 빠진 본인이 "농담이잖아..."라고 얘기할 때까지 주변 사람들을 모두 공포에 떨게 하는 남자, 그리하여 뒤늦게 긴장을 풀어본들 이제 와서는 별로 웃길 것 없는 농담으로 남은 남자. 그런 사람들은 썰렁한 분위기에 머쓱해지면 꼭 그럽니다. "네가 이해하기엔 너무 하이 코미디구나. 오늘 밤에 자려고 누우면 그제서야 낄낄 웃음이 날 걸?"

나도 그런 사람을 하나 압니다. 하루에도 열두 번, 아니 열두 번이 뭡니까, 대략 평균 5분 간격으로 "그걸 아는 사람이 그래!"라고 버럭 소리 지릅니다. 우락부락한 생김새와 그런 대사의 시너지, 네, 상당히 살벌합디다. 하지만 <개그콘서트>를 자주 보는 사람이라면 이것이 '집중토론' 코너의 유행어라는 사실을 금방 알게 되겠죠. 게다가 그는 가끔 확인도 합니다. "이거 웃기지, 응?" 처음엔 저게 대체 뭐 하자는 짓인가 싶었습니다. 놀라운 사실은, 자꾸 보다 보면 그 사람 자체가 거대한 개그 코드로 보인다는 거예요. 어쩐지 생각할 수록 웃기는 겁니다. 반박자 어긋나는 괴팍한 타이밍, 폭력적인 말투로 쏟아내는 얄팍한 농담, 그런 와중에 듣는 이의 반응까지 은근히 의식하는, 한 마디로 몹쓸 무규칙 이종 코미디죠.        

위의 대목을 읽을 때, 저는 푸핫, 하고 웃다가 책에 침을 두어방울 튀겼습니다. '뭐가 그리 재미있냐'는 옆 자리 앉은 사람에게 손가락으로 그 페이지를 짚어 주었더니, 그럽니다. "에... 넌 이게 웃겨?" 네, 웃겨요. 그리고 가네시로 가즈키의 매력은 아마도 이 유머 감각이 아닐까 생각했습니다. 불가항력에 대한 불가항력적 울분+한국인의 혈맥을 따라 흐르는 비분강개형 다혈 기질+하드보일드 액션 서스펜스 리얼 하드고어+하이클래스 허무 개그...랄까. 꼭 남자 고등학교의 무덤덤한 익살꾼 같잖아요. 만담도, 성대모사도 안하지만, 왠지 웃기는 녀석 말예요. 가끔 주먹 다짐을 해서 입가가 푸르딩딩 해지기도 하는.
     

p.s. 가네시로 가즈키의 저 녀석들이 궁금하시거들랑, <레볼루션 No3> - <플라이 대디 플라이> - <스피드>의 순으로 읽으시기를 권합니다. 사실 뒤죽박죽 섞어서 읽어도 상관은 없지만, 저 순서로 읽어야 가장 재미있거든요.

Posted by 알 수 없는 사용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