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단단(短短)한 독서'에 해당되는 글 9건

  1. 2008.03.19 <보르헤스에게 가는 길>: 대문호는 대체로 귀엽기 마련인가 10 by 알 수 없는 사용자
  2. 2008.03.08 <우연의 음악>: 연애와 사랑은 다르다 7 by 알 수 없는 사용자
  3. 2008.01.16 <레볼루션 No3>: 생각할 수록 웃기는 농담 3 by 알 수 없는 사용자
  4. 2008.01.08 <미네르바 성냥갑>: 사이먼 코웰이 기호학자였다면? 7 by 알 수 없는 사용자
  5. 2008.01.03 <스밀라의 눈에 대한 감각>: 얼음에 덴 화상의 뜨거움 3 by 알 수 없는 사용자
  6. 2008.01.02 <바리데기>,<아프리카인>: 소설가의 낭독법 2 by 알 수 없는 사용자
  7. 2007.11.30 <마미야 형제>: 형제는 고요했다 3 by 알 수 없는 사용자
  8. 2007.11.28 <피버피치>: 팬이 된다는 것 2 by 알 수 없는 사용자
  9. 2007.11.26 <인간실격>: 시작은 아무렇지도 않은 듯이. 2 by 알 수 없는 사용자
읽은 건 죄다 복사하듯 기억하던 시절도 있었건만, 요즘은 조금 전에 읽은 구절조차 까맣게 잊어버리곤 합니다. 기억력이 흐려진 건지, 알코올이 드디어 대뇌의 주름 사이사이까지 알뜰하게 절인 건지, 아니면 오만가지 비루한 생각이 섞어찌개처럼 머릿속에서 들끓고 있기 때문인건지, 잘 모르겠습니다. 이유야 뭐가 됐건 무슨 상관입니까. 나는 노화를 겪고 있거나(기억력 감퇴), 문학과 인생에 대해 논하며 - 죄송합니다. 실은 '남자'와 '야구'에 대해 떠들며 - 권거니 잣거니 술잔을 기울이는 시절도 이제 막장이거나(알코올 부작용), 멸종 위기 동물 보호나 부시 암살 같은 건설적인 고뇌는 뒤로 미룬 채 먹고 사는 문제에만 골몰하는 자잘한 마음의 도시월급생활자인 겁니다. 뭐, 껄껄 웃으며 강남대로를 뛰어다닐 만큼 기쁘지는 않군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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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보르헤스에게 현실의 정수는 책 속에 있었다. 책을 읽고, 책을 쓰고, 책에 대해 이야기하는 것이 그 알맹이였다. 그는 수천 년 전에 시작돼서 한 번도 끝난 적이 없는 대화를 이어가고 있음을 본능적으로 인식했다. 책은 과거를 복원했다." 
- 알베르토 망구엘, <보르헤스에게 가는 길>


말도 마십쇼. 이 구절이 생각이 안나서, 책을 읽다 말고 세 번이나 다시 들춰봐야 했지 뭡니까. 알베르토 망구엘이 그러는데, 보르헤스는 실수로라도 뭘 잊어버리는 법이 없었대요. 백과사전부터 온갖 소설의 묘사, 수수께끼, 경구, 이탈리아의 장시, 오래된 탱고의 가사까지, 읽은 건 구체적인 구절을 암송할 정도로 모두 기억했다는군요. 정작 본인이 쓴 책은 단 한권도 집에 두질 않았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자신이 쓴 모든 문장을 남김없이 기억했다고도 하고요. 심지어 낯선 책방에 가더라도 책 등 한 번 쓰다듬어 보고 그 내용을 단박에 알아챘다고 합니다. 아, 말 안 했던가요? 보르헤스는 쉰여덟에 완전히 실명했습니다. 그리고 열여섯 살짜리 알베르토 망구엘이 저녁마다 책을 읽어주던 무렵에, 보르헤스는 이미 예순다섯이었습니다. 앞이 보이지 않는 보르헤스는 구술해줄 만한 사람이 나타날 때까지 마음 속으로 한 줄씩 문장을 썼고, 완성된 문장을 소리 내어 불러줄 때가 되면 완벽한 '글'을 막힘 없이 토해냈다고 합니다. 정말이지 대단하지 않습니까? 그러니 1964년부터 1968년까지 보르헤스와 함께 책을 읽고, 그가 불러주는 시를 받아 적었던 알베르토 망구엘은 뭐가 돼도 돼야하지 않겠습니까? (결국 이 사람은 '세계적인 독서가이자 저술가'라는 거창한 존재가 됐습니다. 책을 엄청나게 읽고 책 읽은 얘기를 쓰는 부러운 직업이랄까요. 내 방 책장에는 그가 쓴 <독서의 역사>라는 두꺼운 책이 꽂혀 있습니다.)

눈을 또록또록 뜨고 무엇이든 읽고 쓸 줄 아는, 그래봐야 겨우 서른 언저리인 나는 생각합니다. 난 대체 뭐가 문제인거냐. 하지만 닥치는대로 읽고, 또 어깨에 앉은 비듬 털어내듯 시원하게 잊어버리면서 다시 생각합니다. 우주를 떠도는 '기억력 에너지'란 게 있다면 말이죠, 보르헤스나 망구엘 같은 사람이 있기 때문에 나 같은 사람도 존재하는 것이 아닐까요. 그래야 우주 전체의 기억력 에너지가 일정하게 유지될 거 아니겠어요? 기억과 망각이 고르게, 공평하게, 민주적으로다가. (...라고 썼지만, 실은 헛소리 같습니다. 생각해봤는데 아무래도 술 때문이에요.)    

이쯤에서, 이 책의 권말에 수록된 '보르헤스 어록 사전'을 소개합니다. 읽으면서 깔깔 웃거나 무릎을 탁 치던 순간이 꽤 여러 번 있었는데, 역시나 책을 덮고 나니 머릿속이 참 휑합니다. 기억나는 것이라고는 '보르헤스 이 양반, 참 귀여우시구나' 하는 감상 밖엔. 무슨 말인지는 아래의 발췌한 부분을 읽어보면 아실 겁니다. 그리고 구절구절 총기 있게 잘 기억해두셨다가, 어느 날 어디선가 "보르헤스 어록... 사전이었던가?"를 웅얼거리며 쩔쩔매는 삼십대 여인을 발견하시면 슬그머니 다가와 귓속말로 일깨워주시면 감사하겠습니다.  



갖는다는 것: 쇼펜하우어는 우리가 가지고 있는 것이 우리를 행복하게 만들 수 없지만, 우리에게 부족한 것은 분명히 우리를 불행하게 만든다고 말했다. 가령, 어금니 통증으로 고통받는 사람은 그렇지 않은 사람들이 행복할 것이라고 생각하는 오류를 범한다. 사랑받지 못하는 것과 병에 걸리는 것은 어금니 통증의 또 다른 형태이다.

노벨상: 나는 영원히 미래의 노벨상 수상자가 될 것 같다. 아마도 그것이 스칸디나비아의 전통인 것 같다.

도서관: 도서관을 정리하는 것은 아무 말 없이 비평을 하는 행위다.

무용(無用): 나는 기린의 목이 너무 길다고 불평할 수 있지만, 그렇다고 그것이 기린의 모습을 바꿀 수는 없다.

무인도: 사람들에게 무인도로 가져갈 책이 무엇이냐고 물으면, 대개는 <돈키호테>라고 대답한다. 그러나 20일간의 휴가를 갖게 되면, 그들은 아무 책도 가져가지 않는다.

민주주의: 매우 널리 유포된 미신. 통계의 남용.

믿음: 나는 믿음을 가지고 있는 사람들이 특별하게 행복하다고 느끼지 않는다는 것을 알았다. 반대로 그들은 근심으로 가득 찬 세상에서 살고 있고, 하느님의 정의에 대해 끔찍한 두려움을 가지고 있으며, 그것도 모자라 받을 자격도 없는 상이나 벌을 기다린다.

보수주의: 보수주의자가 된다는 것은 정치적으로 회의주의자가 되는 것이다. 즉, 우리가 실수할지도 모르기 때문에 사물들을 바꾸려고 하지 않는 것이다. 우리가 살고 있는 세상은 그리 정의롭지 않지만, 다른 세상은 또 다른 형태의 부정(不正)이 될 수도 있다. 이것 외에도, 보수당은 광신(狂信)을 만들 수 없다는 장점이 있다. 우리는 광적인 민족주의자, 광적인 자유주의자, 광적인 공산주의자가 될 수 있다. 그러나 광적인 보수주의자가 될 수는 없다. 보수주의자가 된다는 것은 인내와 체념을 요구하기 때문이다.

복수: 복수는 아무 소용도 없는 것이며, 잔인하고 황당한 것이다. 진정한 복수는 망각과 용서다.

비행기: 비행기 회사는 공포를 조성하는 전문가인 것 같다. 비행기를 타면 우리는 "산소마스크가 얼굴 위로 떨어질 겁니다." "즉시 담배를 꺼주십시오." "구명조끼를 입고 공기를 넣으십시오"와 같은 말을 들을 수 있다. 하지만 당신이 기차를 탄다면, 기차가 충돌할 것이라는 말을 절대로 들을 수 없을 것이다.

서명: 나는 내 수많은 책에 서명을 했다. 그러므로 내가 죽게 되면, 내 서명이 없는 내 책이 훨씬 큰 값어치를 지니게 될 것이다.

선물: 사람들은 내 책을 구입하지만 읽지는 않는다. 그런데 왜 내 책을 살까? 한참이 지난 후에야 나는 내 책이 선물로만 사용된다는 사실을 알았다.

영향: 나에게 영향을 끼치지 않은 작가는 하나도 없다. 비록 내가 그들을 읽지 않았고, 내가 좋아하지 않는 작가라고 해도 말이다. 그러나 한 사람만을 선택하라면, 나는 주저하지 않고 체스터턴을 택할 것이다. 물론 버나드 쇼가 그보다 훨씬 훌륭한 작가이다. 하지만 우리는 우리가 모방하길 원하는 작가를 모방하는 것이 아니라, 우리가 모방할 수 있는 작가를 모방하는 것이다.

자살: 헤밍웨이는 스스로 목숨을 끊었다. 그것은 자기가 위대한 작가가 아님을 깨달았기 때문이다. 바로 이것이 그의 작품을 부분적으로나마 구원한 요인이다.

작위: 아마도 모든 장르 중에서 가장 작위적인 장르는 탐정소설일 것이다. 죄는 합리적 사고에 의해 들춰지는 것이 아니라 고발이나 밀고에 의해서 밝혀지기 때문이다.

잠자기: 잠을 자면 자신에 관해 잊게 된다. 그러나 잠이 깨면 자신을 기억한다.

젊음: 언젠가 누가 나에게 이렇게 물었다. "현대 시인들에 관해 어떻게 생각합니까?" 그러자 나는 이렇게 대답했다. "아주 젊은 시인이 있는데, 이름이 베르길리우스라고 하지요. 정말 전도유망한 청년입니다."

제안: 나를 비방하는 글들을 읽을 때마다, 나는 그런 감정을 공유할 뿐 아니라, 심지어 더 나은 방법으로 날 비난할 수도 있었을 것이라고 생각한다. 아마도 앞으로 있을 자의 적들에게는 그들의 비평을 출판하기 전에 나에게 보내라고 충고해야만 할 것 같다.

죽음: 만일 불멸이 존재한다면, 죽음이란 장난이다.

직업: 시인은 자신의 직업이 감정을 표현하는 것임을 알고 있는 사람이다. 그러나 자기가 남에게 충고해줄 수 있는 사람이라고 생각한다면, 그것은 큰 실수다.

타고르: 분명한 사기꾼이며, 스웨덴의 고안품. 그는 형편없는 시인이며, 장점이라고는 천국의 튜닉을 입은 것밖에 없다.

필요성: 우나무노는 불멸을 제시하지 않는 신은 믿을 수 없다고 썼다. 하지만 난 그렇지 않다고 생각한다. 내가 계속 목숨을 부지하길 원치 않거나, 우주가 나를 필요로 하지 않는다고 생각할지도 모르는 신이 존재할 수도 있다. 어쨌건 신은 내가 태어난 1899년까지 나를 필요로 하지 않았다.

하느님: 우리를 사랑하는 전지전능한 하느님이 있다는 생각은 환상문학의 가장 위대한 고안이다. 그러나 나는 하느님에 관한 생각이 리얼리즘 문학에 속한다면 더욱 좋을 것이라고 생각한다.

협박: 죽이겠다는 협박 이외에 다른 형태의 협박이 있을 수 있을까? 누군가를 불멸로 만들겠다고 협박하는 것은 아마도 매우 흥미롭고 독창적인 협박일 것이다.

확장: 쟁기와 칼은 손의 확장이다. 소우주는 눈의 확장이다. 그러나 책은 그 이상이다. 책은 기억의 확장인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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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지막 날 밤에 그녀가 말했다.
"나는 당신이 나를 사랑하지 않는다는 걸 알아요. 하지만 그렇다고 해서 내가 당신한테 안 어울리는 여자라는 뜻은 아녜요. 당신은 자기 멋대로 하는 사람이니까 떠나야 한다면, 좋아요, 떠나야겠죠. 하지만 내가 여기 있다는 것만 기억해 둬요. 어쩌다가라도 누군가의 팬티 속으로 기어들고 싶어서 근질거리면 내 팬티를 맨 먼저 생각해요."
  - 폴 오스터, <우연의 음악>


: 저렇게 말할 수 있는 여자를 어떻게 생각해야 할까요.
그녀는 당신이 짐작하는 것보다 훨씬 더 대담하고 똑똑하다고? 저 태연한 선언 뒤에는 그렇게 '즉물적'이고 '굴욕적'(이라고 타이핑하는 순간, 나의 애정관, 혹은 남성관, 혹은 가장 거대한 욕구가 어떤 종류인지 백일하에 드러나는군요)인 대상으로 남는 한이 있더라도 그를 잃는 일만은 모면하려는 가여운 여자가 숨어 있다고? 그녀는 완벽하게 건조된 감정의 소유자이며, 그에게 바라는 것은 질척한 구애가 아니라 오직 단도직입적인 섹스 뿐이라고? 떠나는 발 뒤꿈치에 매달리고, 애정을 구걸하고, 끈끈한 눈물을 흘리고, 심장이 터져나갈 애정을 가감없이 보이는 짓이야 말로 남자를 도망치게 만드는 악행이라 믿는 그녀는, 실은 정치적이고 외교적인 유혹의 대가라고? 서랍 속의 검정 양말처럼 흔하디 흔해서, 하나쯤은 줄어도 상관 없는 섹스 파트너에게 될대로 되라는 심정으로 실험적인 화법을 시도해보는 초연한 여자라고? 실은 저런 여자는 이 세상에 존재하지 않으며, 그녀의 대사는 이 책을 쓴 폴 오스터가 남자이고, 그를 비롯한 이 세상 모든 남자들의 대뇌 어딘가에 아련한 판타지로 저장되어 있는 '그 무언가'를 직설적으로 꺼내놓은 것이라고?
글쎄. 난 잘 모르겠습니다.  

어른이 되자 연애는 더 이상 발렌타인 데이의 초콜릿처럼 달콤하지 않았습니다. 소녀 취향의 판타지와 그를 향한 단순한 열정은, 연애가 사랑의 동의어가 아니며 실은 상대에게서 내 욕망을 채우려고 끙끙대는 구차한 과정이라는 사실을 깨달으면서 자취도 없이 증발했지요. 사랑은 다분히 관념적입니다. 이를 테면 신(神)이나 정의, 공중도덕처럼, 존재한다는 사실을 증명하기보다는 그저 믿어주어야 하는 가치인 것이죠. 그러나 연애는 금요일 오후 7시의 영화 티켓이나 언 손을 덥히는 36.5도의 체온이나 인터넷으로 주문한 콘돔 상자처럼 촉감이 있는 현실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영원할 수 없어요. 그래도 연애는 사랑을 지향하리라 믿었습니다. 적어도, 그렇게 믿고 싶었던 것 같네요.



"나는 당신에게 돌아오겠다고 했소. 난 지금 약속을 한 거요."
"나도 당신이 약속을 했다는 거 알아요. 하지만 그렇다고 해서 당신이 약속을 지킬 거라는 뜻은 아녜요."
 
- 폴 오스터, <우연의 음악>



: 또, 또 이럽니다. '연애소설'과는 KTX 타고 네 시간 거리쯤 떨어져 있는 <우연의 음악>에서 고작 이런 구절이나 집어내다뇨. 사실 이 책을 읽은 지는 꽤 됐습니다. 동대문의 헌책방에서 '오늘 막 들어온 헌책'(묘하게 역설적인 표현 아닙니까?)이라며 주인 아저씨가 뻐기듯 내줬던 책이죠. 읽은 지는 2년쯤 되어서, 현실과 환상의 경계를 백일몽처럼 들쑤시던 그 얼개 사이로 또렷한 것은 이 몇 문장 뿐이네요. 책을 읽던 그 무렵 골몰하던 생각 때문이었겠죠. 2006년의 나는 생각했습니다. 세상이 달라졌고 사람들이 변했고, 그래서 연애의 풍경도 예전과는 다르지만, 그래도 그 달라진 껍데기 안에 도사린 본질만은 그대로라고요. 2006년의 나는 또 궁금했습니다. 대체 나는 네게서 무엇을 보고 무엇을 믿어야 하나? 무엇을 가져야지 나는 너를 온전히 가졌다고 안도할 수 있나? 그리고 2006년의 나는 머리가 아팠습니다. 연인에게서 갈망하는 것은 1986년이나 2006년이나 조금도 달라지지 않았는데, 이제는 내 진심을 보이는 것조차 전략과 전술이 되어 피 튀기는 연애의 전장을 이리저리 헤매야 하는 기분이었으니까요. 그때의 나는 이렇게 썼습니다. "'너만을 원한다'는 허물어진 고백보다는 섹스 후의 '즐거웠어, 그럼 안녕'이 쿨하고, '이제 너를 너무 사랑해서 나도 어쩔 수가 없어' 같은 끈끈한 호소는 그를 지구 반대편으로 도망치게 만들 거라는 강박. 밀었다가 당겼다가, 조였다가 풀었다가, 감추었다가 보여줬다가…를 반복하는 감정적인 첩보전이 연애란 말인가. 정말 그런 건가."       

2008년의 나는 생각합니다. 그것도 한 때구나. 조지 버나드 쇼는 “사랑은 두 사람이 서로 다른 점을 과장하는 흥미로운 과정”이라고 말했다는데, 그렇다면 연애는 두 사람이 서로 다른 점을 은폐하는 과정인 것 같습니다. 그 은폐에 지치거나 심드렁해지면 연애도 끝이 나겠죠. 그러니 연애가 언제나 사랑을 지향하는 건 아닌 셈입니다. 씁쓸하지만 받아들이기로 해요. 세상에는 불가항력이라는 것도 있으니까.



* <W KOREA> 2006년 3월호에 이 글의 일부가 실린 적이 있습니다. 하지만 이 글을 쓴 사람은 어쩐지 그때와는 꽤나 다른 사람이 된 것 같네요.

Posted by 알 수 없는 사용자

그날, 망키는 기분이 몹시 안 좋았다. 배구공을 발로 차고 있는 현장을 목격한 망키는 "배구공은 축구공이 아니다"라는 이의의 여지가 없는 정론을 내세워 우선 우리들의 뺨따귀를 갈겼다. 그리고 'S코의 방'이라 불리는 체육 주임실로 우리를 끌고가, 정좌를 하게 한 상태에서 토킹을 세 방씩 먹였다. 그 토킹이 적중하면 대개 으윽, 끄윽, 허억, 컥, 하고 만화의 말풍선 같은 신음을 토하는데 순신은 달랐다. 코로 황소 같은 숨을 내뿜을 뿐 절대로 소리를 지르지 않는다. 망키는 그게 또 마음에 들지 않아 순신만 일으켜 세워 따귀를 다섯 대 올려붙였다. 순신의 몸은 꿈쩍도 하지 않았다. 망키는 속이 부글부글 끓어 "과연 조선 놈이 질기군"하고 조롱하듯 말했다. 순신은 그 말에 피식 웃음으로 대답했다. 그런데 순신이 정좌하고 있는 친구들의 줄로 돌아가려고 등을 보였을 때 망키가 그 등에다 대고 "이런 겁쟁이 같은 자식"하고 폭언을 했다. 망키는 실수를 했다. 순신의 눈꼬리 흉터가 순간적으로 빨갛게 물들었다. "배구공이 축구공이 아닌 것"처럼, "순신은 겁쟁이"가 아니다. 순신이 다닌 민족학교에는, '겁쟁이'라는 소리를 듣고서 싸움을 하지 않으면 반드시 왕따를 시킨다는 불문율이 있어, 그 소리를 들으면 조건반사적으로 펀치가 나갈 수밖에 없도록 성장한다.

그런 사연이 있으니, 뒤를 돌아본 순신은 망키의 아래턱에 묵직한 라이트 훅을 퍼부었다. 삼반규관이 순간적으로 마비된 망키는 평행감각을 잃고 무릎을 꺾었다. 순신은 정수리 머리카락을 움켜잡고 망키를 억지로 일으켜 세워, 이번에는 코를 표적으로 펀치를 날렸다. 퍽, 하는 소리가 나면서 코가 뭉개지자 순신은 표적을 바꾸어 신장 부근을 난타했다. 망키는 완전히 의식을 잃었고, 코에서는 피가 쿨럭쿨럭 쏟아져나왔다. 나는 때를 가늠해 말리려고 끼어들었다. 다른 친구들이 망키를 양호실로 데리고 가는 동안, 순신은 교실 의자에 고개를 푹 숙이고 앉아, 울음 섞인 목소리로 내게 말했다.


"전부 다, 물거품이 됐어."


<명상록>도 <선의 연구>도 <에크하르트 설교집>도 오트의 <성스러운 것>도 벤야민의 <폭력비판론>도, 모든 것이 망키의 한마디에 순신의 머리에서 날아가버리고 말았다. 나는 순신의 어깨를 툭툭 두드리면서 말했다.


"다시 읽으면 되잖아."


- 가네시로 가즈키, <레볼루션 No.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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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가 읽은 책은 이 표지가 아니었습니다. 재출간의 은혜가 가네시로 오라버니를 굽어 살피셨군요.



: 혹시 주변에 이런 사람이 있습니까? 험상궂게 생긴 <개그콘서트> 마니아, 그래서 무뚝뚝한 얼굴로 각종 최신 유행어를 구사하는 남자, 그런데 그게 농담이라는 걸 아무도 몰라주는 남자, 그래도 굴하지 않고 김구라 성대모사를 시도하는 남자, 그런데 다들 "이게 뭐야~"가 시비 거는 말인줄 알고 사색이 되고, 결국 맥 빠진 본인이 "농담이잖아..."라고 얘기할 때까지 주변 사람들을 모두 공포에 떨게 하는 남자, 그리하여 뒤늦게 긴장을 풀어본들 이제 와서는 별로 웃길 것 없는 농담으로 남은 남자. 그런 사람들은 썰렁한 분위기에 머쓱해지면 꼭 그럽니다. "네가 이해하기엔 너무 하이 코미디구나. 오늘 밤에 자려고 누우면 그제서야 낄낄 웃음이 날 걸?"

나도 그런 사람을 하나 압니다. 하루에도 열두 번, 아니 열두 번이 뭡니까, 대략 평균 5분 간격으로 "그걸 아는 사람이 그래!"라고 버럭 소리 지릅니다. 우락부락한 생김새와 그런 대사의 시너지, 네, 상당히 살벌합디다. 하지만 <개그콘서트>를 자주 보는 사람이라면 이것이 '집중토론' 코너의 유행어라는 사실을 금방 알게 되겠죠. 게다가 그는 가끔 확인도 합니다. "이거 웃기지, 응?" 처음엔 저게 대체 뭐 하자는 짓인가 싶었습니다. 놀라운 사실은, 자꾸 보다 보면 그 사람 자체가 거대한 개그 코드로 보인다는 거예요. 어쩐지 생각할 수록 웃기는 겁니다. 반박자 어긋나는 괴팍한 타이밍, 폭력적인 말투로 쏟아내는 얄팍한 농담, 그런 와중에 듣는 이의 반응까지 은근히 의식하는, 한 마디로 몹쓸 무규칙 이종 코미디죠.        

위의 대목을 읽을 때, 저는 푸핫, 하고 웃다가 책에 침을 두어방울 튀겼습니다. '뭐가 그리 재미있냐'는 옆 자리 앉은 사람에게 손가락으로 그 페이지를 짚어 주었더니, 그럽니다. "에... 넌 이게 웃겨?" 네, 웃겨요. 그리고 가네시로 가즈키의 매력은 아마도 이 유머 감각이 아닐까 생각했습니다. 불가항력에 대한 불가항력적 울분+한국인의 혈맥을 따라 흐르는 비분강개형 다혈 기질+하드보일드 액션 서스펜스 리얼 하드고어+하이클래스 허무 개그...랄까. 꼭 남자 고등학교의 무덤덤한 익살꾼 같잖아요. 만담도, 성대모사도 안하지만, 왠지 웃기는 녀석 말예요. 가끔 주먹 다짐을 해서 입가가 푸르딩딩 해지기도 하는.
     

p.s. 가네시로 가즈키의 저 녀석들이 궁금하시거들랑, <레볼루션 No3> - <플라이 대디 플라이> - <스피드>의 순으로 읽으시기를 권합니다. 사실 뒤죽박죽 섞어서 읽어도 상관은 없지만, 저 순서로 읽어야 가장 재미있거든요.

Posted by 알 수 없는 사용자
TV를 보다가 문득 이런 생각이 들었습니다. <아메리칸 아이돌>의 사이먼 코웰을 '8개국어에 능통한 기호학자이자 철학자, 불세출의 유머감각을 가진 칼럼니스트, 베스트셀러 소설가' 버전으로 업그레이드 하면 움베르토 에코가 될 지도 모른다고요.
, 압니다. 만약 움베르토 에코 아저씨가 들었다면 뭬야?!를 부르짖으며 일 디보(Il Divo) CD를 손날 격파할 소리지요. 하지만 유들유들함에 냉소를 가미한 후 약간의 유머감각을 곁들여 쏟아내는 사이먼 코웰의 독설은 세상의 바보들에게 웃으면서 화내는 움베르토 에코의 화법과 얇디 얇은 교집합을 이루는 것도 사실입니다. 절대로 틀린 얘기를 하는 법은 없다는 점이 특히 그렇습니다.   

자, 그렇다면 이쯤에서 아래의 글을 읽어BOA요



글을 잘 쓰는 방법

인터넷에서 나는 글을 잘 쓰는 방법에 대한 일련의 지침들을 발견했다. 그리고 그것을 약간 수정하여 내 것으로 삼았다. 많은 사람들, 특히 글쓰기 학교에 다니는 사람들에게 유용할 것이라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1. 두운을 피하라. 비록 올빼미들을 유혹할지라도. (역주: 이탈리아 어로 allitterazione(두운), allettare(유혹하다) 그리고 allocco(올빼미)는 두운이 일치한다)
2. 접속사를 피해야 하는 것은 아니지만, 그러나, 오히려 필요할 때는 쓰도록 한다.
3. 기성품 문장들을 피하라. 그건 <다시 데운 수프>와 같다.
4. 자신의 생각을 표현하라. 자신을 살찌우게 하니까.
5. 상업적 기호&약자etc.를 사용하지 마라.
6. 괄호는 (꼭 필요해 보일 때도) 담론의 흐름을 방해한다는 것을 (언제나) 기억하라.
7. 말없음표들의…… 소화 불량에 걸리지 않도록 주의하라.
8. 가능한 한 따옴표를 적게 사용하라. 그것은 "목표"가 아니다.
9. 절대로 일반화하지 마라.
10. 외국어는 절대 엘리건트한 스타일을 만들지 않는다.
11. 인용을 줄여라. 에머슨이 올바르게 지적하였듯이 <나는 인용을 증오한다. 단지 네가 아는 것만 말해라>.
12. 비유는 기성품 문장과 같다.
13. 과잉 설명을 하지 마라. 똑같은 말을 두 번 반복하지 마라. 반복한다는 것은 불필요하다(과잉이라는 말은 독자가 이미 이해한 내용을 불필요하게 다시 설명하는 것을 의미한다).
14. 단지 똥 같은 놈들이나 저속한 말을 사용한다.
15. 언제나 대충 구체적이도록 하라.
16. 단 하나의 단어로 문장을 만들지 마라. 없애라.
17. 지나치게 과감한 은유들을 조심하라. 그것은 뱀의 비늘 위에 돋은 깃털과 같다.
18. 쉼표는, 정확한 곳에, 넣도록 하라.
19. 콜론과 세미콜론을 구별하라: 비록 쉽지 않을지라도.
20. 만약 적절한 이탈리아 어 표현을 찾지 못하더라도 절대로 사투리 표현에 의존하지 마라. <페소 엘 타콘 델 부소.> (역자 주: peso el tacon del buso. 베네치아의 사투리 속담으로, 병보다 오히려 치료가 더 나쁜 경우를 가리킨다.)
21. 어울리지 않는 은유를 사용하지 마라. 비록 <노래하는> 것처럼 보일지라도. 그것은 마치 탈선한 백조 같다.
22. 정말로 수사학적 질문이 필요한가?
23. 간략하게 하라. 긴 문장을 피하고, 가능한 적은 숫자의 단어 안에다 자신의 생각을 압축하도록 노력하고-또는 삽입구를 넣지 마라. 그것은 불가피하게 산만한 독자들을 혼란스럽게 만드니까- 그리하여 담론이 분명히 매스 미디어의 권력에 지배되는 우리 시대의 비극들 중 하나를 이루는(특히 불필요하거나 필수 불가결하지 않은 자세한 정보들로 쓸모없게 채워졌을 경우) 정보의 오염에 기여하지 않도록 하라.
24. 과장하지 마라! 감탄 부호를 적게 써라!
25. 야만적 표현을 좋아하는 최악의 <팬들>이라도 외국어를 복수로 만들지 않는다.
26. 외국어 이름을 정확하게 써라. 가령 보둘레르, 루즈웰트, 니채 등처럼.
27. 언급하는 저자나 등장인물들을 완곡하게 표현하지 말고 직접 지명하도록 하라. 19세기 롬바르디아 출신의 최고 작가이자, <5월 5일>의 작가도 그렇게 했다.
28. 글의 첫머리에서 독자의 환심을 사기 위해 <감사의 표시>를 하도록 하라(그런데 혹시 여러분이 너무나도 멍청해서 내가 지금 말하고 있는 것을 이해하지 못할 수도 있다).
29. 철자를 자새하게 학인하라.
30. 반어법은 얼마나 지겨운 것인지 말할 필요도 없다.
31. 너무 자주 문단을 바꾸지 마라.
최소한 불필요할 때에는.
32. <위엄 있는> 1인칭 복수를 절대 쓰지 마라. 우리는 그것이 나쁜 인상을 준다고 확신한다.
33. 원인과 결과를 혼동하지 마라. 오류를 범하게 될 것이며, 따라서 실수할 것이다.
34. 논리적으로 결론이 전제에서 도출되지 않는 글을 쓰지 마라. 만약 모든 사람이 그렇게 한다면, 전제가 결론에도 도출될 것이다.
35. 옛날 표현이나 <아팍스 레고메나>처럼 이례적인 어휘들, 리좀 같은 <심층 구조>를 너무 많이 사용하지 마라. 그것들은 아무리 그라마톨로지적 <차연>의 현현이나 해체론적 표류에의 권유처럼 보일지라도-만약 그것이 극도로 세심한 문헌 비평 의식과 함께 읽는 삶의 세밀한 검토에 의해 논박의 여지가 있는 것으로 드러날 경우 더 나쁠 것이다-어쨌든 수신자의 인지 역량을 넘어서기 때문이다.
36. 너무 장황하지 않도록 하라. 그렇다고 그보다 덜 말하지 않도록 하라.
37. 완성된 문장이 되어야 하는데
(1997)
- 움베르토 에코, <미네르바 성냥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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실제로 보는 표지는 이것보다 양호합니다.





한동안 지하철 4호선과 7호선에서 절찬리 애독했던 <미네르바 성냥갑>은 움베르토 에코가 얼마나 귀여운 독설가인가, 그리고 그 톡쏘는 말 맛을 제대로 살리지 못한 한국어 역자는 또 얼마나 귀엽지 못한가를 생각하게 했습니다. 이탈리아의 유명 주간지 '에스프레소'에 연재되었던 짧은 칼럼들을 모은 책이고요, 국내에 몇 년 앞서 번역 출간된 전작 <세상의 바보들에게 웃으면서 화내는 방법>보다 좀더 날카로운 주제를 좀더 날카로운 말투로 건드렸다는 인상입니다... 저... 거기... 혹시 지금 주무시는 건가요...? 잠깐만요, 거의 끝나가거든요? 그러니까 에... 정치나 미디어 같은 격렬한 주제보다는 맛 없고 소화도 안되는 기내식에 대한 철학이 한결 투철한 - 말하자면 지금 이 글을 쓰고 있는 사람 같은 - 분이라면 <세상의 바보들에게...>를 먼저 읽으시라고 권하고 싶습니다. 진짜 만화책만큼이나 낄낄거리면서 읽게 된다니까요.    
솔직히 말해서, 움베르토 에코의 이 글이 뭐가 웃긴지 모르겠다는 사람과는 도저히 친해질 자신이 없지 뭐예요.

 
Posted by 알 수 없는 사용자


에스키모, 아니 '이누이트' 부족이 눈(snow)을 묘사하는 단어와 표현은 수백가지나 된다, 왜냐하면 인간의 언어란 결국 그를 둘러싼 세계를 질료 삼아 빚어지기 때문이다...라고 썼더라면 폼이 제대로 날 뻔 했습니다. 하지만 그럴 수 없었어요. 이게 엄청난 과장이었다는 걸 얼마 전에야 알게 됐지 뭡니까. 실제로 그 사람들이 사용하는 눈에 대한 어휘는 네 개뿐이래요. '하늘에서 내려오고 있는 눈(가나 gana)', '땅에 내려앉아 쌓여있는 눈(아풋 aput)', '바람에 이리저리 휘날리는 눈(픽써폭 pigsirpog)'. '바람에 휘날려 무더기로 쌓여있는 눈(지먹석 gimugsug)', 이렇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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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지만 <스밀라의 눈에 대한 감각>을 읽다 보면, 그게 전부 과장만은 아니겠다는 생각이 듭니다. 이 책의 행간에 깃든 눈과 얼음의 세계는 무한한 바다만큼, 영원한 우주만큼이나 너비와 깊이를 짐작하기 어렵습니다. 페터 회(장난으로 그럼 이 사람은 회페터야? 그럼 회선생이겠네? 응응?” 따위를 부끄러운 줄도 모르고 잘도 주절댔던, 낯선 이름의 덴마크 작가죠)의 문장 또한 얼음물 속에서 뜨거워지는 몸처럼(한겨울에 산에서 냉수마찰 해보신 분들은 이게 뭔 소린지 다 아실 겁니다), 얼음에 덴 화상처럼 차가운 듯 뜨겁고, 폭발적이면서도 서늘합니다. 가장 단정한 수학식처럼 한 단어 한 단어 또박또박 낭비 없이 사용했는데, 어쩐지 읽을수록 서서히 빠져드는, 발가락 끝부터 머리 꼭대기까지 저항할 수 없이 젖어 드는, 매 단어의 의미를 곱씹고 싶은, 무한대로 수렴되는 눈과 얼음의 세계를 남김 없이 알고 싶어 조바심이 나는, 왼쪽에 쥔 페이지가 늘어날수록 오른쪽에 쥔 페이지가 점점 줄어드는 게 안타까워 눈물이 날 것 같은, 그런 글입니다. (인터넷 서평을 읽다 보니 의외로 이 책의 번역을 지적한 글들이 눈에 띄었는데, 나로서는 다소 의아한 일이었습니다. 번역에 꽤나 민감한 편인데도 이 책을 읽으면서 그런 점을 전혀 못 느꼈을뿐더러, 오히려 번역자의 담담한 글 투가 스밀라와 꽤나 잘 어울린다고 생각했거든요.)



사랑에 빠진다는 것은 대단히 과장된 얘기다. 사랑에 빠지는 것은 상대에게 받아들여지지 않으리라는 두려움 45퍼센트와 이번에는 그 두려움이 무색하게 되리라는 광적인 희망 45퍼센트, 거기에 소박하게 사랑의 가능성에 대한 여린 감각 10퍼센트를 더하여 이루어진다. 나는 더 이상 사랑에 빠지지 않는다. 내가 더 이상 볼거리에 걸리지 않는 것처럼. ...(중간 생략)... 나는 사랑에 빠진 적이 없다. 그러기에는 지나치게 명확하게 사물을 바라본다. 사랑에 빠진다는 것은 광기의 한 형태다. 증오, 냉담, 분노, 중독, 자살과 밀접하게 관련되어 있는. - 페터 회, <스밀라의 눈에 대한 감각>


 

: 앞에서 굳이 이누이트 족을 들먹인 이유는, 이 책의 주인공인 '스밀라'가 덴마크의 유복한 의사인 아버지와 이누이트 사냥꾼인 어머니 사이에서 태어난 사람이기 때문입니다. 젠체하는 문명과 무심한 자연의 경계선에 서 있는 존재랄까요. 복잡할지는 몰라도 혼란스럽진 않은 인물 같았습니다. 스밀라 역시 눈처럼, 얼음처럼, 차가운 이성으로 뜨겁게 움직입니다. 그녀는 키 160센티미터에 몸무게는 고작 50킬로그램(그린란드의 강풍과 추위를 생각하면 너무나 왜소한 체격인 겁니다), 사람보다는 눈과 얼음을 신뢰하고 수학의 완벽함을 신봉하는 사람입니다. 또 그녀는 37세의 독신녀입니다. 그러나 그녀를 움직이게, 어떤 사건에 뛰어들게 한 것은 이웃집 아이의 죽음이었어요. 가장 의외의 순간에 따뜻한 속내를 보일 것 같은 사람, 실연 당했다고 질질 울면서 찾아가면 같이 침 튀기며 비열한 ex’를 욕하는 대신 끝맺는다는 게 그래같은 건조한 비평을 하고는 시커멓게 번진 마스카라를 닦아주고 자기 침대에 재워줄 것 같은 언니입니다.

실은 이 책을 읽었던 2005년의 기분이 그랬어요. 책 소개에 보면 추리소설로서의 매력뿐만 아니라 미스터리와 로맨스, 스릴러, 문명 비판, 철학적 통찰 등 각 장르의 요소들을 적재적소에 구현하고 있는 작품이랍디다마는, 그 무렵 가망 없는 감정에 허덕이던 눈에는 유독 사람과 사람 사이, 관계, 그 너머로 흐르는 시간, 불가항력적이고 불가해한 것, 사랑이라고도 할 수 있는 것, 그런 구절들만 밟혔습니다.    



나는 결코 수리공을 알았던 게 아니었다. 몇 시간 전까지 나는 우리가 침묵으로 맺어진 유대감의 순간을 공유했다고 생각한다. 그가 그린란드 스타의 승강대를 가로질러 걸어가는 것을 보았을 때 나는 우리가 언제나 낯선 사이였다는 것을 깨달았다. 젊었을 때는 섹스가 친밀감의 정점이라고 생각한다. 나중에 섹스는 거의 시작에 미치지도 못한다는 것을 발견하게 된다. - 페터 회, <스밀라의 눈에 대한 감각>



: 어쩌면 나는 이 책을 완전히 오독하고 있는 것인지도 모릅니다. 나는 이 책을, 살인 스릴러가 아니라 철학적인 로맨스로 읽었습니다. 적어도 내게는 그랬으니까요. 그렇지 않았다면 그 두꺼운 책 어딘가에서 가슴이 뻐근해지는 일도 없었을 테고, 지하철 4호선의 어딘가에서 남몰래 눈물을 훔치는 일은 더더구나 없었을 거예요.



살은 빠져서 수척한 수준에서 깡마른 수준으로 바뀌고 있다. 잠은 모자라 눈은 눈구멍 속으로 퀭하니 패어 있다. 하지만 아직도 나는 거울 속의 낯선 사람을 보고 미소짓는다. 인생에서의 행복과 슬픔의 분포는 간단한 산수로 얻을 수 없고 표준 할당 같은 것도 없다. 인생을 살 만한 가치가 있게 해주는 몇 안되는 사람들 중의 하나가 크로노스호에 타고 있다. - 페터 회, <스밀라의 눈에 대한 감각>



; 끝내준다능, 오나전 킹왕짱이야. 우왕ㅋ굳ㅋ … 이렇게 호들갑을 떨 마음은 없었습니다. 그렇게 보이고 싶지도 않았습니다. (이미 늦었는지도 모르지만요.)    




내 어머니가 돌이오지 않게 되었을 때, 나는 어떤 순간도 마지막이 될 수 있다는 것을 깨달았다. 인생의 어떤 것도 단순히 한 장소에서 다른 장소로 가는 통로가 될 수는 없다. 마치 남겨놓고 가는 유일한 것인 양 매 걸음을 떼어야 한다.
- 페터 회, <스밀라의 눈에 대한 감각>



: 2005
1228
의 일기를 꺼내봤습니다. 아마 <스밀라…>를 다 읽었거나, 최소한 절반 이상 읽은 날이었겠죠. 위의 대목을 발췌해놓고 이렇게 한 줄 썼더군요. “아아, 이 책을 이제서야 읽게 되다니. 슬프다. 기쁘다.”


Posted by 알 수 없는 사용자

10분 정도 일찍 도착했는데, 장내는 이미 만원이었습니다. 진행요원들은 앉을 자리를 찾지 못한 사람들을 위해 서둘러 여분의 의자를 들여왔습니다. 프랑스 문단에서 한국소설을 대표하는 작가 황석영과 프랑스 현대소설의 거장 르 클레지오 공개대담 및 낭독회라는 길고 긴 제목의 행사인데도 그랬습니다(행사의 제목이 길면 대개 지루하기 마련이잖아요). 얼른 자리를 찾아 앉은 내 옆으로, 한국어, 프랑스어, 일본어의 조각을 흘리며 다양한 생김새의 사람들이 지나갔습니다. 이곳은 이화여자대학교 국제교육관이고, 관객들이 충심으로 도열한 정면으로는 황석영과 르 클레지오가 담담한 얼굴로 앉아 있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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진부한 단어이긴 하지만 어쩔 수 없이
사내를 떠올리게 하는 황석영 선생수줍과묵의 중간지점쯤에 서 있는 듯한 르 클레지오는 여러 가지로 대비가 되는 조합이었습니다. 그러나 두 사람은 프랑스인과 한국인이라는 국적을 넘어, 이주자의 후손(르 클레지오는 아프리카에서 자랐고, 황석영은 만주 장춘에서 태어났습니다)이자 정신적인 국외인이라는 공통점을 지녔지요. 쾌활한 황석영 3세 연상인 르 클레지오를 형님이라 부르고("르 클레지오 형님과 불어로 얘기를 나눌 수 있도록 불어를 좀 배워볼까 합니다"라고 황석영 선생이 말하자, 옆에 있던 최미경 교수가 "르 클레지오 선생님과 불어로 대화를 할 만큼 불어를 익히시려면..."이라며 말 끝을 흐렸습니다), 두 작가 모두와 번역 작업으로 인연이 있는 최미경 교수가 진행을 맡은 덕분에 대담장의 공기는 날 서지 않은 지적 자극으로 기분 좋게 달아올랐습니다. 사실, 이 낭독회에 가게 된 것도 2년 전 쯤 취재를 인연으로 만난 최미경 교수님이 초대를 해주신 덕분이었어요. 서로의 모국어를 이해하지 못하는 두 소설가를 나란히 모시고 진행하는 대담회 치고, 어색한 침묵 한 번 없이 그토록 매끄럽고 유쾌하게 이어지는 행사는 정말이지 처음 봤습니다. 결국 나는 촬영을 끝낸 사진기자가 '어서 가자'며 옆구리를 쿡쿡 찌르며 보채는데도 차마 자리를 뜨지 못하고 끝까지 남아 있었습니다. (먼저 가라며 등을 떠미니 사진기자가 눈을 흘기더군요. 이런, 신체건강한 대한민국 육군병장 소녀 같으니라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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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러나 무엇보다 인상적이었던 것은 대담이 끝난 후 있었던 두 소설가의 낭독이었습니다. 황석영 선생의 낭독을 직접 들은 것은 처음이었는데, 스스로
황구라를 자처할 정도로 입담이 좋은 줄은 알았지만 책 읽는 소리가 그리 유려할 줄은 몰랐어요. 그의 구성진 음성과 굽이굽이 서사의 골짜기를 더듬는 연극적 발성은 듣는 이가 저도 모르게 조급한 메모를 멈추고 바라볼 만큼 흡인력이 있었습니다. 선생은 바리의 독백을 읽을 때 어린 여자 아이처럼 소리를 가늘고 높게 내는가 하면, 자연스럽게 구사하는 북한 발음은 그것이 돌아가신 할머니의 것이었을 때 더욱 구슬프게 낼 줄을 알았습니다.

기래기래, 이승 저승이 달라 벨수가 웂지비. 너거 걱정이 돼서 불렀구나. 이제부텀 나 하는 얘기 잘 들으라. 수천수만 리 바다 건나 하늘 건너 갈 텐데 그 길은 악머구리 벅작대구 악령사령이 날뛰는 지옥에 길이야. 사지 육신이 다 찢게질지두 모른다. 하지만 푸르구 누런 질루 가지 말구 흰 질루만 가문 된다.
- 황석영, <바리데기>


모두들 숨을 죽이고 선생의 목소리에 귀를 기울였습니다. 그런 다음 같은 부분을 프랑스어로 번역한 텍스트를 르 클레지오 선생이 낭독했습니다. 목소리에도 명도가 존재한다면, 그의 목소리는 밝은 노랑처럼 온화하며 창백했어요. 프랑스어 특유의, 혀를 입 안 낮은 곳에 두고 내는 먹먹한 발음과 끝이 가늘게 떨리는 음성은 황석영 선생과는 대조적으로 차분했으나, 뜻 모를 그 낯선 언어의 울림만은 참으로 서정적이라는 생각이 들었지요. 이어 르 클레지오의 <아프리카인>, 순서를 바꾸어 프랑스어로 먼저 읽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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모든 인간은 한 아버지와 한 어머니의 결과다. 우리는 그들을 인정하지 않거나 사랑하지 않을 수 있고, 그들에 대해 의혹을 품을 수도 있다. 그러나 그들은 여기 존재하며, 그들 자신의 얼굴, 태도, 삶의 양식이나 기벽뿐 아니라 그들의 허망한 꿈, 희망, 손과 발가락의 모양, 눈과 머리카락의 색깔, 말투, 생각, 그리고 어쩌면 죽게 될 나이까지도 포함한 모든 것이 우리를 통과하며 흔적을 남긴다.
-르 클레지오, <아프리카인>

황석영 선생의 한국어 낭독은 조금 전 르 클레지오 선생이 발음한 낯선 언어의 의미를 우리에게 들려주었습니다. 다양한 국적의 사람들 사이로 깊숙이 공명하던 두 언어의 텍스트는, 문학의 단단한 외피 아래 담긴 것이 실은 형식도 법칙도 필요 없는 원초적인 아름다움이었음을 새삼 깨닫게 했습니다. 그날 오후 나는 문학에 대해, 글을 쓰고 읽는 것에 대해 곰곰이 생각하고 은밀하게 행복했습니다.         




* 이 글의 요약본이 <W KOREA> 2008년 1월호에 게재되었습니다.
photos by Lee Sang Hack
Posted by 알 수 없는 사용자

'마미야 형제'라고 하기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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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거...?
라고, 잠시 생각했습니다.

물론 그럴 리는 없습니다. '마미야'는 마미야 아키노부와 마미야 테츠노부 형제의 성(姓)이니까요. 마미야 아키노부는 홀쭉하게 살점 없는 허리를 천 벨트로 잔뜩 동여맨 차림새(이 대목에서 그만 개그맨 이윤석 씨를 떠올리고 말았습니다)를 한 양조회사 직원입니다. 여름이면 좋아하는 야구팀의 경기 스코어를 확인하기 위해 반드시 6시 전에 퇴근하고, 캔 맥주의 맛은 어떤 상황에서도 신뢰할 수 있다는 믿음을 가지고 있지요. 그 밖에 12번의 맞선 경험과 12번의 퇴짜 경력이 있습니다. 서른다섯이라는 나이를 생각해보면, 마음에 둔 여자 앞에서 곧 울음을 터트릴 기세로 웅얼거리는 그의 소심함이 좀 이상스럽기도 합니다. 이번엔 그의 동생인 테츠노부를 볼까요. 마미야 테츠노부는 온몸이 둥그렇게 살이 찐 초등학교 직원입니다. 주말에 외출할 때면 형이 탐탁지 않아하는 검정색 가죽 헤비메탈 재킷을 입고요, 서른두 살인데도 이변이 없는 한 커피 우유를 차게 식혀서, 혹은 뜨겁게 데워서 내내 들이키는 사람입니다. 형과 마찬가지로 테츠노부도 변변한 연애 경험이 없습니다. 그러나 형과는 달리 안 되더라도 일단 돌진하고 보는 타입이지요. 짧은 연애(실은 일방적이기 그지 없는 짝사랑)가 끝날 때마다, 테츠노부는 동네 외곽의 고가선로를 지나는 신칸센을 보러 갑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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형제는 둘이 삽니다. 둘이 함께 맥주와 커피우유를 마시고, 둘이 함께 퍼즐 잡지를 탐독하고, 둘이 함께 책을 읽고, 둘이 함께 동네 츠케면 가게에서 외식하고, 둘이 함께 스포츠 경기를 보거나 음악을 듣고, 기분이 좋지 않은 길을 갈 때면 둘이 함께 소리 내어 노래를 부르며 갑니다. 그리고 이것이 마미야 형제의 가장 희한한 점이죠.



"마미야 형제에게는 지금껏 연인이 있었던 적이 없다. 그렇기 때문에 실연이라고 해도 그것은 어디까지나 저 혼자 꾸준히 쌓아 올린 호의를 짓밟히는 데 지나지 않는다. 팍삭 혹은 와지끈. 양치도 샴푸도 게을리하는 법 없고, 심성 고운 마미야 형제이긴 했으나, 실제로 그들과 면식이 있는 여자들의 의견을 종합하면,
'볼품없는, 어쩐지 기분 나쁜, 집 안에만 틀어박혀 사는, 너저분한, 도대체 그 나이에 형제 둘이서만 사는 것도 이상하고, 몇 푼 아끼자고 매번 슈퍼마켓 저녁 할인을 기다렸다가 장을 보는, 애당초 범주 밖의, 있을 수 없는, 좋은 사람인지는 모르지만 절대 연애 관계로는 발전할 수 없는...' 남자들이었다."
- 에쿠니 가오리, <마미야 형제>



: 그것 참 단어 하나하나가 싹퉁바가지인 품평입니다마는, 두 형제에 대한 책의 묘사를 곱씹어보면 또 그리 반대할 수만은 없는 지적이기도 합니다. 아키노부가 식은 땀을 흘리며, 혹은 테츠노부가 손수 녹음한 음악 CD를 저돌적으로 내밀며 만약 내게 사랑을 고백해온다면, 안타깝지만 이렇게 말할 수밖에 없을 겁니다. "마미야 상, 스미마셍."

재미있는 것은 이야기의 진행 방식, 혹은 소설의 시선입니다. 이야기에 파장을 일으키는 주요 사건들은 대부분 마미야 형제 본인들과는 직접적인 관계가 없습니다. 명색이 '타이틀 롤'인데도 말이죠. 대신 마미야 형제의 주변 인물들의 사건 사고가, 바람 없는 바다 같은 형제의 자분자분한 일상에 틈입하여 솜씨 있게 직조됩니다. 형제의 삶은, 주변 사람들의 불륜, 이혼, 막다른 연애 같은 풍랑이 일 때면 이따금씩 따라 흔들릴 뿐입니다. 그러나 언제나 그렇듯이, 물결은 바다에 아무런 흔적도 남기지 못하죠. 광고 카피는 '리얼 순정 브라더스, 여친 만들기 대작전!'이지만, 책은 오히려 형제의 일상을 촘촘하게 따라가는 데 충실한 듯 합니다.



" "둘이서 살자. 조용히. 지금까지처럼." 뭐야. 형을 침실로 데려가면서 테츠노부는 이해할 수 있었다. 동생의 행복을 바라면서도, 형은 쓸쓸한 거다. "화장실 말고 다른 데 토하지 마, 알았지?" 어조가 부드러워졌다. 언젠가 여기를 나가게 돼도. 테츠노부는 생각한다. 여기를 나가게 돼도, 나는 형을 내버려 두어서는 안 된다. 그게 누구든 - 지금은 우선, 사오리의 얼굴을 떠올린다 - 내 여자도 그러길 바랄 것이다." - 에쿠니 가오리, <마미야 형제>



: 이 책을 야금야금 읽다 보면, 마미야 형제네 집에 놀러가서 함께 직소 퍼즐을 맞추고 다이아몬드 게임을 하고 싶어집니다. 향신료를 이것저것 넣고 야채가 완전히 흐물흐물해질 때까지 푹 끓인 테츠노부의 카레도 맛보고 싶고요. 사실 에쿠니 가오리의 책을 읽고 이런 생각을 한 것은 정말이지 처음입니다. 지극히 개인적이고 편협한 감상이긴 합니다만, 그동안 "하지만 나, 아무에게나 그렇게 하진 않으니까" 같은 그녀의 호흡 짧은 문체를 읽을 때마다 "그만둬, 그런 어리광 따위!"라고 일본어 번역투로 짜증내고 싶었거든요.

조용한 사람의 반짝반짝함은 그의 일상을 찬찬히 들여다보지 않으면 느낄 수 없겠다, 는 생각을 해봤습니다.    



* <W KOREA> 2007년 4월호에 이 글의 요약본이 게재되었습니다.
Posted by 알 수 없는 사용자
"나는 축구와 사랑에 빠지고 말았다. 마치 훗날 여자들을 만나 사랑에 빠지게 될 때처럼, 느닷없이, 이유도 깨닫지 못한 채, 맹목적으로 축구에 빠져들고 만 것이다. 그 사랑 때문에 앞으로 겪게 될 고통이나 분열 상태에 대해서는 안중에도 없었다."
- 닉 혼비, <피버피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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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지막 순간까지 책 사는 걸 망설이게 했던 이 책의 표지는, 이렇습니다.



: <어바웃 어 보이>, <하이 피델리티('사랑도 리콜이 되나요'라는 부끄러운 한국어 제목으로 둔갑했던 영화)>의 원작자인 닉 혼비는 알만한 사람은 다 아는 강박적인 축구팬입니다. '축구팬들이 다 그렇지'라고 아무렇게나 말해버릴 비(非)축구팬에게는 이렇게 말하고 싶습니다. "님하, 워-워." 이 사람의 상태는 꽤나 심각하단 말입니다.  


"딱 한 번의 예외라면, FA컵 경기였던 웨스트브롬 전이었다. 내가 축구장에 가지 않더라도 이 경기에서만큼은 아스날이 꼭 이기기를 바랐건만, 1-0으로 지고 말았다. (경기가 수요일 밤에 있었기 때문에 나는 결과가 나오기 전에 자러 가야 했다. 그래서 아침에 일어나자마자 볼 수 있도록 어머니가 종이에다 스코어를 써서 책장에 붙여놓으셨다. 나는 그 종이를 한참 동안 빤히 쳐다보았다. 어머니가 써놓으신 숫자를 보고 배신감을 느꼈다. 어머니가 나를 사랑하신다면, 분명 그보다 나은 스코어를 써놓으셔야 했다. 숫자 뒤에 붙은 느낌표도 스코어만큼이나 잔인했다. 느낌표라니, 그것은... 마치 친척의 죽음을 강조하기 위해 느낌표를 붙여놓은 것처럼 부적절하게 느껴졌다. '할머니는 주무시다가 평화롭게 돌아가셨다!' 당시 나는 이런 실망감이 아주 새롭게 느껴졌지만, 지금은 다른 모든 팬들과 마찬가지로 익숙해졌다." -닉 혼비, <피버피치>


: 열두어살 때 부모님의 이혼을 겪은 닉 혼비는 혼곤한 어린 마음을 고스란히 축구에 던져 넣습니다. 축구와 정서적으로 너무 뒤죽박죽 얽힌 나머지, 그는 자신의 인생이 아스날팀의 경기 결과와 함께 흘러간다는 망상에 사로잡힌 어른으로 자랍니다. 그의 대뇌 한 구석에는 언제나, 무슨 일을 하건, 슬그머니 또아리를 튼 축구가 고개를 내밀고 있습니다. 막 잠에서 깬 여자친구가 달콤한 목소리로 "지금 무슨 생각해?"라고 물었을 때, 친척의 결혼식이나 조카의 세례식에 참석할 수 없는 이유를 설명해야할 때, 혹은 인생 최악의 슬럼프에 빠진 이유를 고민할 때면, 그의 머릿속에서는 '축구'가 거대한 전광판에 아로새겨져 형광빛 네온사인을 번쩍거리는 겁니다. 그의 표현을 빌리자면, '축구 경기가 불러일으키는 흥분은 제 정신과 상식을 포함한 모든 것을 집어삼켜 버린다'는군요.


"사실 나는 아버지에게 이렇게 말씀드렸어야 했다.
"저기요, 홈에서 보통 리그 경기를 볼 때도 저는 아스날이 질까 봐 너무너무 두려워서 말도 못 하고, 생각도 못 하고, 때때로 숨조차 제대로 쉴 수가 없거든요. 만약 스윈든이 백만 분의 일이라도 이길 가능성이 있다면, 아버지는 지금 저를 데리고 집으로 돌아가시는 게 좋을 거예요. 저는 그 충격을 감당할 수 없으니까요."
내가 그렇게 털어놓았더라면 아버지가 나를 데리고 경기장 안으로 들어가는 것은 상식에 어긋난 행동이 되었을 터이지만, 나는 그냥 궁금한 척, 어느 쪽이 이길 것 같은지 여쭤보았다. 아버지는 다른 사람들처럼 아스날이 3-0이나 4-0으로 이길 것이라 생각한다고 하셨으므로, 내가 원하던 확답을 얻은 셈이었다. 그래도 나는 죽을 것처럼 두려웠다. 어머니가 써놓으신 스코어 뒤의 느낌표에 이어, 아버지의 경솔한 확신도 나를 배신할 것만 같았다."
- 닉 혼비, <피버피치>


: 저는 야구팬입니다. A매치 축구경기는 열을 내며 시청하고, 상암 월드컵 경기장에도 두어 번 가서 끈적한 땀과 흥분한 침을 흩뿌렸지만, 그건 그저 옆집 아이의 머리를 쓰다듬어 주는 젊은 어머니의 자세였달까요. 아무렴 내 새끼가 이쁘지, 옆집 애가 더 귀하겠습니까. 야구 시즌이 끝난 11월부터 다음해 3월까지의 공백은, 제게 그저 무고한 나무의 시체로 만든 5장의 달력일 뿐입니다. 그렇다고 야구 시즌 중에도 마냥 꽃분홍 뭉게구름 같이 행복한 나날만 계속되는 건 아닙니다. 좀 더 구체적으로 말하자면 야구에는 아량곳 하지 않고 도도히 흘러가는 세상을 원망하는 나날이 계속됩니다. 야구 경기도 없는 월요일에 왜 방송 3사는 버젓이 스포츠 뉴스를 방송하는 걸까? 일주일 중 삶의 의욕이 가장 저조한 날을 조롱하는 의미에서? 어째서 9시 뉴스의 앵커는 코나미컵 일본전에서 19세 광속구 투수 김광현이 통한의 투런 홈런을 맞은 날에도 "참으로 어처구니 없는 일이 아닐 수 없습니다!"라는 비분강개를 오프닝 멘트로 선택하지 않을까? 1년에 딱 하루 있는 올스타전 중계를, 앞의 식전 행사 뛰어 넘고 뒤의 경기 끝자락 잘라먹으며 방송하는 SBS 방송국 따위는 애저녁에 폭파 시켰어야 하는 거 아닌가? 포스트 시즌에도 평소처럼 밤에 잠을 이루거나 궁둥이를 의자에 무사히 붙여둘 수 있는 냉혈한들은 야구팬들의 혈관을 타고 흐르는 혁명적 기운을 감지한 정부 비밀 기관의 사주로 강철 심장 이식 수술이라도 당한 걸까? 대체, 어떻게, 야구 앞에서 태연할 수 있을까!


"팬이 된다는 것에 대해 내가 확실히 알고 있는 것 한 가지는 이것이다. 겉보기와는 반대로, 팬이 된다는 것은 대리 만족이 아니며, 구경을 하느니 직접 축구를 하겠다는 사람들은 핵심을 제대로 파악하지 못한 것이다. 축구를 보는 것은 결코 수동적인 활동이 아니며, 실제로 뛰는 것과 마찬가지다. 물론 에어로빅의 차원에서 하는 이야기는 아니다. 경기를 보면서 담배를 뻑뻑 피워대고, 경기가 끝난 다음 술을 마시고, 집에 돌아가는 길에 칩스를 먹는 일에는 그라운드를 뛰어다니는 운동 효과가 없기 때문이다. 그러나 승리했을 때 느끼는 만족감은, 그라운드의 선수들로부터 뿜어져 나와서 창백하고 지친 표정으로 응원석 구석에 서 있는 우리 같은 사람들에게 희석되어 전달되는 것이 아니다. 우리가 느끼는 기쁨은 선수들이 느끼는 기쁨에서 뭔가 함량이 빠진 것이 아니다. 비록 골을 넣고, 웸블리의 계단을 올라 다이애너 확태자비를 만나는 것은 그들이지만 말이다. 이럴 때 우리가 느끼는 기쁨은 남의 행운을 축하해 주는 것이 아니라, 우리의 행운을 자축하는 것이다. 재난에 가까운 패배를 겪고 났을 때 우리를 집어삼키는 슬픔은 실은 자기 연민이며, 축구가 소비되는 방식을 알고 싶은 사람이라면 무엇보다도 이 사실을 깨달아야 할 것이다." - 닉 혼비, <피버피치>
 

: 팬이 된다는 것은, 결국 이런 겁니다. 비이성적이고, 미성숙한 편애를 밥 먹듯 하며, 무엇으로도 설명되지 않는 일체감으로 행복과 불행을 맛봅니다. (그렇다고 야구장에 널브러져 소주팩을 들이켜다가 "야, 때려쳐라!"를 고래고래 소리지르는 게 잘하는 짓이라는 뜻은 아닙니다) 경기에서 졌을 때 느끼는 상대적 박탈감은, 2위 팀과 꼴찌팀 팬들에게 똑같이 쓰라립니다. '져도 멋진 경기'란 철든 사람, 즉 잠실 야구장 근처를 지날 때에도 심장 박동이 2배속으로 뛰어오르지 않고 상대팀 홈런 타자에게 동물의 이름을 섞은 욕설을 퍼붓는 일도 없는 사람에게나 가능한 개념이니까요. 스포츠팬이 종종 다혈질의, 통제불능의, 앞뒤 안가리고 무식한 어린애 취급을 받는 것도 다 이런 이유에섭니다.
자, 이야기가 길었습니다. 요는 이겁니다. 혹시 스포츠 팬이십니까? 반갑습니다. 이 쌀쌀맞은 세상, 우리 한 번 어울렁더울렁 의지해 살아봅시다.
혹시 스포츠 팬이 아니십니까? 님하, 관심염. 지금 이 순간에도 당신의 야구팬(혹은 축구팬, 혹은...etc) 남자친구는 소란스러운 소외감에 조용히 몸을 떨고 있을지도 모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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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책은 두번에 걸쳐 영화화 됐습니다. 왼쪽은 심란한 헤어스타일의 콜린 퍼스가 주연한 1997년작, 오른쪽은 축구팀 아스날을 야구팀 보스턴 레드삭스로 바꿔 만든 2005년작입죠.



* 이 글의 사소한 일부는 <W KOREA> 2005년 7월호에 기고했던 글에서 가지고 왔습니다.
    
Posted by 알 수 없는 사용자




책을 쓰고 책을 읽는다는 것.
책을 추천하고 책을 추천 받는다는 것.
책을 선물하고 책을 선물 받는다는 것.
그것만큼 서로를 이해할 수 있는 것이 또 있을까?

- 다자이 오사무, <인간 실격>





: 옳습니다. 단순간결하므로 완전무결한 문장이 아닌가 합니다.    
무려 다섯 번이나 자살 시도를 한 끝에 기어이 마흔 전에 요절한 작가가 남긴 말이라기엔 퍽 안온합니다마는, 그런 점에서 '서로를 이해'한다는 것에 회의적인 사람이 책에 대해 쓰기에 앞서 인용하기에는 더할 나위 없이 적당하다는 생각이 드는군요.  

책을 읽다가 밑줄을 긋고 싶은 문장과 맞닥뜨렸을 때,
혹은 다른 사람의 밑줄을 슬쩍 넘겨다 보고싶을 때 들러주셨으면 합니다.

Posted by 알 수 없는 사용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