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0대 임신은 죄가 아닙니다'에 해당되는 글 1건

  1. 2008.02.28 너무 사랑스러워서 견딜 수 없는 영화 <주노> 5 by marsgirrrl

사용자 삽입 이미지

주노는 이제 16살. 청소년 관람불가 영화도 볼 수 없는 나이인데, 남자친구와 성관계를 가졌고 졸지에 임산부가 되었다. '10대의 임신'이란 설정에 대한 도덕적 판단은 중요하지 않다. 어떻게 하면 이 현실을 슬기롭게 해결하느냐가 더 큰 문제다. 누구보다도 현실 감각을 가지고 있는 주노는 친구와 '입양'을 석택한 뒤, 부모에게 털어놓기로 결심한다. 자, 여기서 퀴즈. 주노 부모의 반응은? 1번, 세상이 끝나기라도한듯 통곡한다. 2번, 엄청나게 분노하며 딸을 미친듯이 때린다. 그러나 답은 3번. 황당한 표정으로 '맙소사' 한 번, 곧 상황파악을 위한 각종 질문과 대안들이 오간다. 아이 아빠의 이름을 말하자 "굼벵이도 긴다더니"라며 살짝 비웃는 아빠. 뒤이은 주노의 "걔 나름 잘했어요"라는 대답. "성생활 하는 줄도 몰랐던" 딸에게 잠시 놀란 부모는 일단 "임산부 비타민부터 먹자"며 딸의 건강을 챙긴다. 물론 훈훈한 분위기는 아니다. 10대 자녀가 있는 가정은 어디나 서먹하긴 마찬가지. 하지만 가족은 위기 앞에서 서로의 의견을 존중하기로, 암묵적으로 합의한다. 화낸다고 시간을 되돌릴 수 있는 건 아니다.

펑크록과 공포영화를 좋아하는 주노는 남다른 유머감각을 내심 자랑스러워하며 10대의 세계에서 살고 있었다. 모든 말을 10대 언어로 소통하는 그녀는, '입양'을 계기로 안정된 삶을 구축한 30대 어른들을 만나 호기심을 품는다. 입양자로 선택된 바네사와 마크 부부는 블루 컬러 노동자 부모를 둔 주노가 상상해보지도 못했던 멋진 집에서 멋지게 살고 있는 사람들이다. 주노의 눈에는 아이만 있다면 정말 완벽할 가정으로 보인다. 그러나 아이가 태어나기도 전에 바네사와 마크의 균열이 조금씩 드러나자, '사랑'과 '어른'에 대한 주노의 환상은 무참하게 깨진다. 아이를 품고 있던 열달 동안 주노는 가족의 사랑을 새삼 깨닫고, 남자 친구와의 '사랑'에 대해서도 진지하게 생각하게 된다. 소재는 도발적이지만 <주노>는 영락없는 성장영화이자 가족영화다. 주노는 아이가 뱃속에서 머무르는 동안 여러가지 경험을 한다. 새엄마가 자신을 지키기 위해 억세게 말싸움을 하는 것도 지켜보고, 아빠의 변함없는 사랑도 재확인하고, 책임감 없는 30대 남자가 얼마나 끔찍한 존재인지도 깨닫는다. 약 10달 동안 어른의 세계를 경험한 주노는 '책임감'과 '믿음'이라는 인생의 교훈을 얻는다. 임신을 하지 않아도 점차 알게될 것들이었지만, 임신을 하고도 '성장을 할 수 있다'는 게 중요하다. 다시 예전의 몸으로 돌아온 주노는 좀더 솔직하게, 그리고 열심히 인생을 살아갈 수 있을 것이다. 주노 역을 맡은 앨런 페이지는 '세상에서 가장 꿋꿋한 10대 임산부'가 되기 위해 태어났다는 듯, 너무도 자연스러운 연기로 관객에게 신뢰를 안긴다. 어른들의 잣대가 아닌, 10대의 눈높이에 맞춰 진행되는 이야기는 쿨하면서 감동적이다.

한국에서 이런 훈훈한 10대 임신 수기가 가능할까? 임신한 10대가 부른 배를 내놓고 학교에 갈 수 있을까? 푸핫, 당장 퇴학감이다. 그런데 <주노>를 보고 나면 이런 의문이 든다. '10대'라는 이유 때문에 '임신'이 너무 큰 죄로 다뤄지는 게 아닐까? 어쩌다 한 번 저지른 실수 때문에 인생을 깡그리 포기해야된다는 건 너무 가혹하지 않은가? 미국이니까 가능하다는 의견도 있다. 그러나 <주노>에서 가장 감동적인 건 그녀의 상처를 최소화시켜주려는 주변인들의 노력 때문이다. 주노 자체가 용기 많은 소녀이기도 하지만, 그 용기의 이면엔 '실수'에도 불구하고 그녀를 믿어줬던 여러 사람들의 노력이 있다. 그렇기에 주노의 임신은 성장의 계기가 될 수 있었고, 새 생명은 세상의 빛을 볼 수 있었다. 우리는 결과를 중시한 나머지, 과정에서 벌어질 수 있는 모든 시행착오를 헛되다고 판단하는 경향이 있다. <주노>는 남들이 보기에 부끄러운 시행착오도 유의미하다고 말한다. 인생이 어떤 것인지는 누구도 모르기에, 함께, 머리를 맞대고, 열심히, 찾아가는 수밖에 없다.

+ 이 글은 <미즈내일>에도 게재된 글입니다.
+ 각본을 쓴 디아블로 코디는 이번 아카데미에서 각본상을 받았습니다. 전직 스트립 댄서 출신이라 화제가 됐는데, <주노>의 성공으로 스필버그와 작업하는 거물 작가로 인생역전 하셨습니다. 극적 전개도 멋지지만 10대 은어가 난무하는 대사들이 놀라울 정도입니다. '오린지'냐, '아륀지'냐를 따지고 있는 제3세계 국가에선 절대 따라갈 수 없는 언어생활이죠. 10대 내부 언어와 10대 외부 언어를 영민하게 대조시키며 두 세계를 부딪히게 만드는 기술이 특히 훌륭합니다.
+ 유머감각만이 이 세상을 구할 수 있어요. 이건 진리에요, 진리!

Posted by marsgirrrl