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니컬 무비'에 해당되는 글 5건

  1. 2008.02.28 너무 사랑스러워서 견딜 수 없는 영화 <주노> 5 by marsgirrrl
  2. 2008.02.15 꼭 봐야 한다 <추격자> 9 by marsgirrrl
  3. 2008.01.11 공항에서 급수습하는 영화들 10 by marsgirrrl
  4. 2008.01.06 우리 생애 최고의 순간 10 by marsgirrrl
  5. 2007.12.06 <엠> 장인과 달인 사이 3 by marsgirrr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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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노는 이제 16살. 청소년 관람불가 영화도 볼 수 없는 나이인데, 남자친구와 성관계를 가졌고 졸지에 임산부가 되었다. '10대의 임신'이란 설정에 대한 도덕적 판단은 중요하지 않다. 어떻게 하면 이 현실을 슬기롭게 해결하느냐가 더 큰 문제다. 누구보다도 현실 감각을 가지고 있는 주노는 친구와 '입양'을 석택한 뒤, 부모에게 털어놓기로 결심한다. 자, 여기서 퀴즈. 주노 부모의 반응은? 1번, 세상이 끝나기라도한듯 통곡한다. 2번, 엄청나게 분노하며 딸을 미친듯이 때린다. 그러나 답은 3번. 황당한 표정으로 '맙소사' 한 번, 곧 상황파악을 위한 각종 질문과 대안들이 오간다. 아이 아빠의 이름을 말하자 "굼벵이도 긴다더니"라며 살짝 비웃는 아빠. 뒤이은 주노의 "걔 나름 잘했어요"라는 대답. "성생활 하는 줄도 몰랐던" 딸에게 잠시 놀란 부모는 일단 "임산부 비타민부터 먹자"며 딸의 건강을 챙긴다. 물론 훈훈한 분위기는 아니다. 10대 자녀가 있는 가정은 어디나 서먹하긴 마찬가지. 하지만 가족은 위기 앞에서 서로의 의견을 존중하기로, 암묵적으로 합의한다. 화낸다고 시간을 되돌릴 수 있는 건 아니다.

펑크록과 공포영화를 좋아하는 주노는 남다른 유머감각을 내심 자랑스러워하며 10대의 세계에서 살고 있었다. 모든 말을 10대 언어로 소통하는 그녀는, '입양'을 계기로 안정된 삶을 구축한 30대 어른들을 만나 호기심을 품는다. 입양자로 선택된 바네사와 마크 부부는 블루 컬러 노동자 부모를 둔 주노가 상상해보지도 못했던 멋진 집에서 멋지게 살고 있는 사람들이다. 주노의 눈에는 아이만 있다면 정말 완벽할 가정으로 보인다. 그러나 아이가 태어나기도 전에 바네사와 마크의 균열이 조금씩 드러나자, '사랑'과 '어른'에 대한 주노의 환상은 무참하게 깨진다. 아이를 품고 있던 열달 동안 주노는 가족의 사랑을 새삼 깨닫고, 남자 친구와의 '사랑'에 대해서도 진지하게 생각하게 된다. 소재는 도발적이지만 <주노>는 영락없는 성장영화이자 가족영화다. 주노는 아이가 뱃속에서 머무르는 동안 여러가지 경험을 한다. 새엄마가 자신을 지키기 위해 억세게 말싸움을 하는 것도 지켜보고, 아빠의 변함없는 사랑도 재확인하고, 책임감 없는 30대 남자가 얼마나 끔찍한 존재인지도 깨닫는다. 약 10달 동안 어른의 세계를 경험한 주노는 '책임감'과 '믿음'이라는 인생의 교훈을 얻는다. 임신을 하지 않아도 점차 알게될 것들이었지만, 임신을 하고도 '성장을 할 수 있다'는 게 중요하다. 다시 예전의 몸으로 돌아온 주노는 좀더 솔직하게, 그리고 열심히 인생을 살아갈 수 있을 것이다. 주노 역을 맡은 앨런 페이지는 '세상에서 가장 꿋꿋한 10대 임산부'가 되기 위해 태어났다는 듯, 너무도 자연스러운 연기로 관객에게 신뢰를 안긴다. 어른들의 잣대가 아닌, 10대의 눈높이에 맞춰 진행되는 이야기는 쿨하면서 감동적이다.

한국에서 이런 훈훈한 10대 임신 수기가 가능할까? 임신한 10대가 부른 배를 내놓고 학교에 갈 수 있을까? 푸핫, 당장 퇴학감이다. 그런데 <주노>를 보고 나면 이런 의문이 든다. '10대'라는 이유 때문에 '임신'이 너무 큰 죄로 다뤄지는 게 아닐까? 어쩌다 한 번 저지른 실수 때문에 인생을 깡그리 포기해야된다는 건 너무 가혹하지 않은가? 미국이니까 가능하다는 의견도 있다. 그러나 <주노>에서 가장 감동적인 건 그녀의 상처를 최소화시켜주려는 주변인들의 노력 때문이다. 주노 자체가 용기 많은 소녀이기도 하지만, 그 용기의 이면엔 '실수'에도 불구하고 그녀를 믿어줬던 여러 사람들의 노력이 있다. 그렇기에 주노의 임신은 성장의 계기가 될 수 있었고, 새 생명은 세상의 빛을 볼 수 있었다. 우리는 결과를 중시한 나머지, 과정에서 벌어질 수 있는 모든 시행착오를 헛되다고 판단하는 경향이 있다. <주노>는 남들이 보기에 부끄러운 시행착오도 유의미하다고 말한다. 인생이 어떤 것인지는 누구도 모르기에, 함께, 머리를 맞대고, 열심히, 찾아가는 수밖에 없다.

+ 이 글은 <미즈내일>에도 게재된 글입니다.
+ 각본을 쓴 디아블로 코디는 이번 아카데미에서 각본상을 받았습니다. 전직 스트립 댄서 출신이라 화제가 됐는데, <주노>의 성공으로 스필버그와 작업하는 거물 작가로 인생역전 하셨습니다. 극적 전개도 멋지지만 10대 은어가 난무하는 대사들이 놀라울 정도입니다. '오린지'냐, '아륀지'냐를 따지고 있는 제3세계 국가에선 절대 따라갈 수 없는 언어생활이죠. 10대 내부 언어와 10대 외부 언어를 영민하게 대조시키며 두 세계를 부딪히게 만드는 기술이 특히 훌륭합니다.
+ 유머감각만이 이 세상을 구할 수 있어요. 이건 진리에요, 진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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간만에 찰진 스릴러 <추격자>

평가는 간단하다. 재미있다. 아주 끈덕지게 재미있다. <공공의 적>보다 압도적인 웰메이드 모양새, <살인의 추억>의 뒷골목 도시 버전, <범죄의 재구성>의 또 다른 '발품' 형제라 부를 법하다. 한국판 형사 스릴러를 잇는 영화가 이제야 도착했다.
<추격자>의 모티프는 잘 알려졌다시피 유영철 사건이다. 그와 오버랩되는 극중 '사이코패스' 연쇄살인범 영민은 무표정한 얼굴로 인질이 된 매춘부의 머리에 망치와 정을 갖다댄다. 막 살인이 시작되려는 순간, 의도치 않은 벨소리가 울리고 상황은 계속 꼬인다. 그와 정면승부를 벌이는 건 경찰 출신 포주 중호. 사라진 여자들과 연관된 전화번호 하나만 믿고 추격에 나선 중호는 왕년의 형사질 실력을 발휘해 영민을 잡고야 만다. 기소까지 가능한 시간은 12시간. 그 안에 증거를 잡지 못하면 살인자라기보다 정신이상자처럼 보이는 영민을 풀어줘야 한다. 경찰 앞에 놓여진 또 하나의 압박은 똥 맞은 서울 시장(!) 관련 뉴스를 감추기 위해 연쇄살인범 사건을 대대적으로 터뜨려야 한다는 것. 중호에겐 사라져버린 매춘부를 찾아야만 하는 개인적 사연이 있고, 경찰은 대국민적 쪽팔림을 피할 업적이 필요하다. 그러나 정신이상한 살인용의자는 의외로 용의주도하다.
<살인의 추억>과 직접적으로 닮은 부분은, 증거 하나 제대로 찾아내지 못한채 우왕좌왕하는 무력한 경찰의 모습이다. 반면, 반은 직업정신(포주)으로 반은 본능적인 사명감(전직 경찰)으로 망원동을 헤집고 다니는 중호는 <공공의 적>의 강철중과 비슷한 다혈질 액션 방법론을 구사한다. 아무 생각없이 자신이 변태임을 서슴치 않고 커밍아웃하면서 치밀함을 잃지 않는 영민의 태도는 <범죄의 재구성>의 코미디와 <양들의 침묵>의 섬짓함을 오간다. 물론 이건 결과론적인 분석이다. <추격자>는 여러 영화에 대한 기시감을 불러 일으키지만 매끈한 봉합으로 자신만의 아우라를 만들어낸다. 풍자 코미디와 슬래셔 호러가 사이좋게 노늬는 양상이다. '내가 웃는 게 웃는 게 아냐' 내지는 '웃고 있어도 소름이 끼친다'라는 복합적인 감정을 제대로 건드린다.
동시에 <추격자>는 <우리동네> <가면> <세븐데이즈> 등이 극복하지 못했던 '반전 드라마' 강박관념을 가볍게 물리친다. 중호에게 계속 '추격' 동기부여를 주기 위한 휴머니티 장치(이것은 스포일러)가 끼어들긴 하지만, 이는 드라마를 위한 게 아니라 장르를 극단으로 몰고 나가기 위한 일종의 지지대다. 영민의 구구절절 사연같은 건 없다. '선'인지 '악'인지도 상관없다. 비뚤어진 사회구조의 책임도 굳이 묻지 않는다. 그저 그는 잡혀야 하는 존재이며, 평온한 포주 생활로 돌아가기 위해 여자 인질을 찾아 이 추격을 어서 마무리지어야 하는 중호의 피곤한 상황만이 존재할 뿐이다. 그래서 <추격자>는 '추격'에만 초점을 맞추며 2시간 5분을 종횡무진한다. 이 얼마나 쿨한 만듦새인가.
전개는 쿨하고 인물들은 징하다. 발품을 풀어 구성한 캐릭터와 대사와 상황은 현장감이 넘친다. 언덕배기 주거지인 망원동(촬영은 북아현동)을 십분 활용한 동선은 '한국형 스릴러'로서의 매력을 느끼게 한다('발품'은 제쳐두고 쓸데없이 과장된 세트를 꾸미고 요트까지 동원하며 촌스러운 럭셔리를 지향하신 <무방비 도시>가 고개 숙여 반성해야될 부분이다). <추격자>는 살인의 이유에 대해 일장연설을 늘어놓지 않지만 이틀밤을 관통하는 카메라를 통해 '막장 사회'의 면면을 찰지게 전달한다. <추격자>가 무서운 이유는 무엇인가? 18금 '망치' 살인이 끔찍해서? 끝끝내 밝혀내지 못하는 영민의 심리 때문이다. 한 사람의 어두움은 겉만 보고 판단할 수 없다. 어쩌면 우리 동네에도 악마가 살지 모른다. 처음 중호가 영민을 살인자로 믿지 못했던 것처럼, 악마를 상상하기에 개인의 상상력은 턱없이 부족하다. 상상 이상의 누군가는 사람 이상의 존재감을 갖는다. 경찰도 막을 수 없는 이 연쇄살인범이야말로 사회의 '괴물'인 셈이다.

+ 에피소드 한토막. 시사회 때 맨 끝줄(들어는 봤나 S열)에 앉게 되서 투덜거리고 있었다. 비상구쪽 의자가 비어 있었는데 무대인사를 마친 나홍진 감독이 떡하니 그 자리에 앉는 게 앉았다. "아뉘, 왜 배우들과 안 앉으세요?"(참고로 시사회에서 배우들은 가운데 중 가운데 자리)라 물었더니 털털한 목소리로 "영화 보다가 화장실을 잘 가서요"라고 말씀하시는. 감독이 옆에 앉았으니 신경쓰면서 볼만도 한데, 완전 몰입이 되서 몇 분뒤 그의 존재를 까맣게 잊었다. 나중에 보니 끝까지 앉아 계시더라. 좀 재미있는 캐릭터로 기억에 남을 듯.


* 이글은 제 개인 블로그 ncreep.egloos.com과 동일합니다. 새로운 생산에 게을러서 죄송.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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언니들, 뜨지 말고 그냥 살아!


한국영화 속 사랑의 결론은 '죽거나 떠나거나' 둘 중 하나다. 한동안 여자배우 살아 있는 꼴 못 보는 감독들이 각종 질병을 검토해 '시한부' 딱지를 붙여댔다. 21세기 들어서는 여자 주인공 죽이는 게 너무 진부하다 생각했는지, 조폭 남자 주인공들이 우르르 등에 칼을 꽂았다. 이젠 웬만한 뮤직비디오도 다 따라할 만큼 닳고 닳은 설정이 되어 버렸지만, 어쨌든 심심하면 한국영화가 써먹는 수법이다. 죽거나 떠나거나.

그런데 2007년 연말, 이 '죽거나 떠나거나'에 새로운 트렌드가 만들어졌다. 사랑을 쫓다 지친 여자들이 외국으로 뜨기 시작한 것이다. 일본에서 한번쯤은 케이크 먹고 미니홈피에 기념사진 올리는 게 대세인 지금, 선남선녀들의 가장 큰 희망은 '유학'과 '여행'이다. 트렌드를 나름 제대로 반영했다는 평을 받았던 <싱글즈>에서 이미 이런 욕망이 등장했었다. 미래가 안 보이는 주인공 나난에게 월 1,000만원짜리 남자가 접근하더니 같이 외국 유학을 가자고 꾄다. 하지만 그렇게 남의 덕에 먹고 살면, 씹던 껌처럼 자기 친구를 차버리는 싸가지 없는 20대 명품족 여자애와 동급이 될까봐 마음을 접는다. 그리고 서울에서 친구와 '으샤으샤' 새로운 인생을 시작한다는 희망찬 청춘 스토리였다. <싱글즈>의 후예들은 어떠한가. 일단 <용의주도 미스신>을 보자. 요즘 야근 1순위 직업인 광고 AE가 어찌하여 남자 넷을 만날 시간을 빼냈는지 미지수지만, 어쨌든 주인공 한미수는 남부끄럽지 않은 남자 만나 남부끄럽지 않은 미래를 설계하고자 한다. 그러나 관계가 꼬이고 꼬여 결국 남부끄러운 상황에 봉착한다는 내용. 그리고 파리 유학을 간다나, 어쩐다나. 남자와 일 앞에서 악착같이 굴던 캐릭터가 '너 자신을 알라'란 충고 한마디에 어찌 이렇게 무너질 수가 있을까?


한예슬과 쌍벽을 이루는 21세기 한국미인 김태희도 <싸움>에서 한국을 뜬다. 결벽증 남편과 이혼한 뒤 공격을 받아온 그녀는 분노를 참지 못하고 계속 싸움에 휘말린다. 싸움 잘 하는 만큼 독립 의지도 강하다. 유리공예가인 그녀는 한 타임에 3,000만원이상 매출 나야 방송 가능하다는 홈쇼핑까지 출연해 물건을 판다. 공예가가 이 정도 인지도가 생겼다면 성공한 것이 아닌가. 그런데 화재로 작품을 잃고 설상가상으로 전남편과 죽을 듯 싸우고 난 뒤, 속세에 미련을 버렸는지 바로 뉴욕 유학을 준비한다. 유학을 떠날 거면 러닝타임 내내 프로페셔널 아티스트인 양 펼쳤던 노력은 뭐였을까? 가진 자의 아르바이트?


커리어우먼만 한국을 뜨는 것도 아니다. 하다못해 <색즉시공 시즌 2>의 여자 주인공은 대학도 마치지 않고 결혼한답시고 한국을 뜬다. 가진 것 없고 어리바리한 남자친구와 헤어질 수는 있다. 그런데 왜 꼭 마음에도 없는 부잣집 도련님에게 안겨 원치도 않는 미국행을 택하는 것일까? 그게 성공이라고 생각하는 것일까?

사실, 결말을 무조건 '공항'에서 수습하려는 방식은 게으른 거다. 물론 젊은 세대가 공항을 심하게 사랑하긴 하지만, 모든 개연성을 무시하고 공항만 보면 히죽거릴 만큼 헤프진 않다. 남자한테 채였다고 바로 유학을 선택하진 않는단 말이다. 여행이라면 모를까. 좋든 싫든, 오랫동안 자리 잡았던 조국을 뜨기 위해선 고민에 고민을 거듭해야 한다. <용의주도 미스신>과 <싸움>과 <색즉시공 시즌 2>의 여자들은 심지어 고민을 나눌 친구도 없다(제작비가 모자라서?). 여자들이 유학에 대한 판타지를 가지고 있는 건 사실이다. 결혼문제 등등에서 벗어나 나이 초월해 자유롭게 살고 싶다는 바람인 거다. 하지만 판타지는 이룰 수 없어서 판타지다. <용의주도 미스신> <싸움> <색즉시공 시즌 2>처럼 간편하고 쉽게 이룰 수 있다면 애초부터 꿈꿀 거리 자체가 못된다. 한국영화들, 쓸데없는 판타지 양산 말고 한국에서 잘 사는 방법이나 찾아보라구!


* 이글은 지면에 실린 글을 옮긴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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배우들, 애썼다!


아테네 올림픽 당시 최고 기대 종목은 다름아닌 축구였다. 2002년 월드컵 4강까지 올랐던 축구가 국민적 기대와 상관없이 덜컥 메달순위권에서 멀어져버렸고, 심심하던 기자들은 꾸역꾸역 이기고 있던 여자핸드볼에 관심을 갖기 시작했다. 급기야는 2004년 8월 29일 결승전에 다다랐다. 후반 막판에 동점, 연장 전후반 동점, 결국 승부던지기까지 이어졌다. 안타깝게도 은메달로 확정됐지만, 땀으로 범벅이 된 선수들의 모습이 그렇게 감격스러울 수가 없었다. TV 카메라 앞에서 눈시울 적시던 남자 감독은 비인기 종목의 서러움까지 북받쳐 더이상 말을 잇지 못했다.

<우리 생애 최고의 순간>(이하 <우생순>)은 본 사람이라면 절대 잊을 수 없는 그 경기, 2004년 아테네 올림픽 여자핸드볼 결승전을 소재로 한 영화다. 쉽지 않은 선택이다. '한국에서 스포츠 영화는 안된다'는 말은 지금까지 절대명제였고, 더군다나 핸드볼은 농구나 축구처럼 화려한 테크닉을 자랑하는 역동적인 스포츠가 아니다. 초점은 역시나 드라마다. 임순례 감독이 프로젝트에 합체하면서 '아줌마'라는 화두가 떠올랐다. 영화적 드라마 장치를 세운건 <화려한 휴가>의 나현 작가였지만, 마무리는 임순례 감독의 몫이다.

영화의 주된 축은 미숙(문소리)와 혜경(김정은)이다. 서른 넷 동갑의 핸드볼 선수인 두 아줌마의 인생여정은 아주 많이 다르다. 미숙은 소속 실업팀이 해체되서 개별 사원으로 재고용한다는 숙연한 감독에 말에 "그래도 정규직이겠지?"라며 '아줌마9단'다운 눈치없는 발언을 날린다. 남편의 빚에 허덕이면서 애 하나 키우기도 더럽고 치사한 상황. 돈도 안되는 핸드볼이 눈에 들어올 리 없다. 그녀 생각에 자신은 한마디로 '돈도 안되는 재능'을 갖고 태어난 참 박복한 년인 셈이다. 반면 좀 있는 집 자식처럼 보이는 혜경은 가방끈 늘인 다음 일본에서 감독으로 활동했다. 아이 하나 있는 이혼녀지만 생활은 어렵지 않다. 더군다나 능력을 인정받아 아테네 올림픽 국가대표팀 감독대행으로 스카웃되어 한국에 돌아온다. 그야말로 '알파녀'의 원조격인 아줌마다. <우생순>에서 계속 갈등으로 내세우는 건 미숙의 삶과 혜경의 커리어가 부딪히는 부분이다. 곧 이들이 함께 맞서야할 새로운 편견이 등장하니, 바로 '아줌마'다. 신인 선수들의 눈총과 나름 권력자들인 협회 남자들 앞에서 삼십대 아줌마들은 똘똘 뭉쳐 버린다. 그리고 여기에 끼어드는 코드 하나가 '한국형 핸드볼'이다. 90년대를 휘어잡았던 여자핸드볼의 자랑스러움은 테크닉이 아니라 '억척스러움'이었다는 사실. 새시대의 새로운 사람들은 계속 '선진화' 운운하며 세련된 방향을 요구하지만 아줌마들은 그런 거 모른다는 듯 개무시하고 몸에 익은 고전적 방식을 고수한다. 그리고 '시크한' 요즘 사람들에게 묻는다. 억척스럽게 사는 게, 그렇게 나빠?

<우생순>에서 가장 생소하면서 반가운 지점은 '핸드볼'이 아니라 '아줌마'다. 남자들의 하소연만 가득하던 스크린에 아줌마들의 삶이 대놓고 등장하는 것이다. 이들은 가정에서도 직장에서도 일인자가 아니다. 명예에 대한 욕심도 없고, 그냥 할 줄 아는 게 핸드볼 뿐이다. 후반의 핸드볼 경기는 남자들의 스포츠 영화만큼 비장하지 않다. 애국심? 그런 거 없다. '그냥 재미있어서 해요'라는 취미생활의 진화도 아니다. 그냥 여자들끼리 함께 모여 무언가를 해낸다는 소박한 의지가 빛날 뿐이다. 단지 포기하기 싫어서. 남에게 지기는 죽어도 싫어서.
한국 아줌마들의 이런 '무목적적' 도전정신이 일면 불편한 건 사실이지만, 그래도 같은 여자로서 연민은 느낄만 하다. 그들은 취미로 스포츠를 즐길 만큼 여유로운 시대의 세대가 아니었기 때문이다. 핸드볼에 회의하던 미숙은 예전 감독이 가르치는 초등학교를 찾아가 핸드볼을 하던 여자아이와 잠깐 대화를 나눈다. "핸드볼 재미있어?" "재미있어요." 어쩌면 그녀의 다음 세대는 핸드볼의 '재미'를 찾을 수 있을지도 모른다. 어쩌면 그녀는 자신도 모르는 사이 누군가의 모범이 될 수 있을지도 모른다. 영화로도 만들어질만큼.

<우생순>이 영화적으로 잘만든 영화일까? 꽤 열심히 만든 장르영화라고는 할 수 있다. 나현 작가는 <화려한 휴가>처럼 가능한 갈등들을 솜씨좋게 배열했다. 지루함을 방지하는 조연의 배치(김지영과 조은지)도 별반 다르지 않다. 그래서 <우생순>은 임순례 영화들 중 가장 장르적이고, 가장 단순하고, 가장 억지스럽게 감동을 불러 일으킨다. 임순례는 한번도 자신의 영화에서 영악하게 눈물을 요구한 적이 없다. 그러나 <우생순>은 실화의 힘까지 보태져 막판 대감동의 물결을 만들어낸다. 하지만 임순례가 아니었다면 애정을 가지고 이렇게 열심히 아줌마들을 쓰다듬어주지 못했을 거다.
결국 이 영화가 얻은 것은 무엇일까? 스포츠 영화도 재미있을 수 있다는 것, 그리고 아줌마들의 이야기도 가치 있다는 점이다. 임순례 영화치곤 다소 실망스럽지만 이런 장점들 때문에 <우생순>을 욕하긴 쉽지 않다. 여자 입장에선 더더욱 그렇다.

+ 쓰다 보니 길어졌어요. 죄송.(계속되는 티스토리 에러로 더 고생)
+ 그럼에도 불구하고 사족. <우생순> 인물같은 아줌마들 일상에서 만나면 굉장히 피곤할 것 같아요. 지하철 자리 하나 놓고 심하게 경쟁하실 분들로 보이거든요. <우생순>은 그런 아줌마들의 고단함을 한번쯤이나마 생각을 하게 만들어요. 그들이 가진 공동체적 가치와 함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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TV 프로그램 <생활의 달인>을 보고 있노라면 두 가지 감정이 교차한다. 몇 십 년 동안 한 우물만 파면 '진기명기 쇼'에 버금가는 직장생활을 할 수 있겠다는 긍정적인 희망이 우선이다. 이어지는 절망. 몇 푼 벌어보자고 뛰어들었던 직업전선에서 생존하기 위해 '기계'가 될 수밖에 없었던 빽 없는 아빠, 엄마의 모습이 가슴에 와서 박힌다. 그러니까 <생활의 달인>에 등장하는 분들은 고색창연한 의지를 가지고 한 길 걸어온 '장인'이 아니다. 빨리빨리 돌아가는 경쟁사회에서 살아남기 위해 '달인'이 될 수밖에 없었던 것이다. 언젠가부터 장인 대신 달인이 만연한다는 사실이 한국 사회의 슬픈 징후로 느껴졌다. 정확한 깨달음의 시점은 <엠>을 두 번 보고 온갖 리뷰를 떠들어본 직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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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화관계자들은 이명세 감독을 두고 '장인'이라고 말한다. 어쩌면 장인은 '고집쟁이'의 완화된 표현일지도 모른다. <엠>은 이명세 감독의 고집을 단적으로 보여주는 증거물이다. 그런데 말이다, 냉소적인 사랑 담론을 현실에서 체화하며 살고 있는 아이들에게 '순수'는 비웃음의 대상이란 거다. 첫사랑의 기억을 떠올릴 때마다 내 인생의 착한 시절도 있었다며 내심 흐뭇해하면서도, 유치하고 우습다며 애써 기억을 접는다. "내 기억 속에 끊겨진 필름 한 조각"을 굳이 찾고 싶지 않다는 말이다. 설정뿐만 아니라 <엠>의 영화 구성방식은 더 고집스럽다. 친절하게 떠먹여줘도 모자를 판에 별 영양가도 없는 '떡밥'을 계속 던지다가, 나중에는 추리물이 아니고 멜로라며 뒤통수를 친다! 이미지를 보고 즐기라는데 '아침 드라마'급 이미지만 보고 살았던 사람들이 갑자기 어둠을 이용한 고차원 편집에 눈뜰 리가 없잖아. 게다가 명료한 것 좋아하는 논술세대는 'A는 A다'라는 답을 원하지, 'A는 A일까?'라는 헷갈리는 철학적 질문이 귀찮다. 아, 영화 해석도 5지 선다형으로 만들어달라니깐!


<엠>처럼 이글도 상당히 헷갈리는 전개가 되어버렸지만, 사실 나는 <엠>을 만든 이명세 장인을 욕하려는 게 아니다.(급반전!) 영화를 소개할 때 무조건 '장르'부터 들이미는 게 대세인 지금, 영화 장인보다는 영화 달인만 가득하다. 시대의 흐름에 빨리 적응해야 돈 모을 수 있다는 가르침이 미덕인 사회에서 장인은 불필요한 존재다. 달인이라면 <엠>을 어떻게 만들었을까? <오픈 유어 아이즈>를 할리우드에서 리메이크한 <바닐라 스카이>를 보라. 상업영화에선 장르 배열이 먼저고 미학은 부차적 문제다. <엠>을 본격적인 스릴러로 바꿔놓는다면 주인공의 기억상실 사이로 플래시백 인서트 컷이 날뛰면서 끝까지 미미가 유령임을 발설하면 안 된다. 문제는 이런 장르 복제가 재미를 제외하면 무슨 의미가 있냐는 거다(적어도 재미는 있을 거라는 관객의 원성이 들려온다). 그래서 장인과 달인은 다르다. 오래 일을 하면 머리가 아주 나쁘지 않는 한(!) 일의 속도는 빨라지지만, 그 와중에 깨달음을 얻고 순결한 자세로 득도해 가는 건 쉽지 않다. 이명세 감독은 그런 장인 정신을 쫓는 흔치 않은 사람이다. 때문에 존재만으로도 빛나는 깨달음을 준다. 강조하자면, <엠>의 잘못은 만듦새가 아니다. 장인 영화를 달인 영화처럼 포장해서 안 볼 사람까지 보도록 부추겨놓고 책임지지 않았다는 게 차라리 잘못이다. 오래된 메밀국수집이 리뉴얼 후에 특별 메뉴를 만들더라도, 광범위한 패스트푸드의 인기를 따라잡긴 힘든 거다.


우리는 모든 정보를 뒤섞어 무의식적으로 '생활의 달인'이 되고자 한다. 그러기 위해선 촌스럽던 과거를 빨리 잊어야 한다. 낡은 건물을 부수고 뉴욕 스타일로 다시 짓는다. 매 계절마다 새로운 옷도 필요하다. 스스로 뒤떨어진 존재가 아님을 증명하기 위해 자나 깨나 노력한다. 뛰어난 적응력은 바람직한 가치다. 요령이 좋은 달인은 효율성을 높인다. 하지만 몰아치는 상황 속에서 '진짜 나'를 잊어버리진 않았는지 한번쯤 정신머리를 챙겨 볼 필요가 있다. 이명세란 장인의 존재가, 그리고 그가 만든 영화 <엠>이 지금 던져주는 화두는 바로 이게 아닐까.

P.S 사실 <엠>을 가장 재미있게 보는 방법은 '필름 끊긴 경험에 관한 영화'로 공감하는 것이다. 한 남자가 일식집에서 술먹고 필름 끊겨 필름 찾다보니 첫사랑까지 뒤지게 되더라고 정리하니, 꽤 괜찮은 스토리 아닌가. 이명세 감독은 "이 영화 필름 안 끊겨본 사람들이 싫어하는 것 같아"라는 말씀도 하셨다. 근데 왜 이렇게 예쁘게 봐줘야 하는가, 라고 묻는다면, 만든 성의만큼 성의있게 봐주는 게 예의라고 생각하니까. 그리고 이 영화 보면 볼수록 멋지기도 하다. 이해 못한다고 짓이겨서 버리는 짓은 자신의 무지를 모르는 부끄러운 애들이나 하는 짓. 문학소년의 유치한 놀음에 민망해서 못보겠다는 분은 이 영화가 취향에 안 맞는 것. 그런 사람은 배우에 낚이는 자신을 반성하며 그냥 이런 영화를 안 보면 된다.

+ P.S를 제외한 전문은 매체에 실린 것을 옮긴 것입니다. 하나라도 올리라는 대장님 말에 편법으로 얼렁뚱땅 업로딩합니다. 왜 마감 때는 바쁜데도 지루한 걸까요?


Posted by marsgirrrl