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올해 첫 훈늉영화'에 해당되는 글 1건

  1. 2008.02.15 꼭 봐야 한다 <추격자> 9 by marsgirrrl
사용자 삽입 이미지

간만에 찰진 스릴러 <추격자>

평가는 간단하다. 재미있다. 아주 끈덕지게 재미있다. <공공의 적>보다 압도적인 웰메이드 모양새, <살인의 추억>의 뒷골목 도시 버전, <범죄의 재구성>의 또 다른 '발품' 형제라 부를 법하다. 한국판 형사 스릴러를 잇는 영화가 이제야 도착했다.
<추격자>의 모티프는 잘 알려졌다시피 유영철 사건이다. 그와 오버랩되는 극중 '사이코패스' 연쇄살인범 영민은 무표정한 얼굴로 인질이 된 매춘부의 머리에 망치와 정을 갖다댄다. 막 살인이 시작되려는 순간, 의도치 않은 벨소리가 울리고 상황은 계속 꼬인다. 그와 정면승부를 벌이는 건 경찰 출신 포주 중호. 사라진 여자들과 연관된 전화번호 하나만 믿고 추격에 나선 중호는 왕년의 형사질 실력을 발휘해 영민을 잡고야 만다. 기소까지 가능한 시간은 12시간. 그 안에 증거를 잡지 못하면 살인자라기보다 정신이상자처럼 보이는 영민을 풀어줘야 한다. 경찰 앞에 놓여진 또 하나의 압박은 똥 맞은 서울 시장(!) 관련 뉴스를 감추기 위해 연쇄살인범 사건을 대대적으로 터뜨려야 한다는 것. 중호에겐 사라져버린 매춘부를 찾아야만 하는 개인적 사연이 있고, 경찰은 대국민적 쪽팔림을 피할 업적이 필요하다. 그러나 정신이상한 살인용의자는 의외로 용의주도하다.
<살인의 추억>과 직접적으로 닮은 부분은, 증거 하나 제대로 찾아내지 못한채 우왕좌왕하는 무력한 경찰의 모습이다. 반면, 반은 직업정신(포주)으로 반은 본능적인 사명감(전직 경찰)으로 망원동을 헤집고 다니는 중호는 <공공의 적>의 강철중과 비슷한 다혈질 액션 방법론을 구사한다. 아무 생각없이 자신이 변태임을 서슴치 않고 커밍아웃하면서 치밀함을 잃지 않는 영민의 태도는 <범죄의 재구성>의 코미디와 <양들의 침묵>의 섬짓함을 오간다. 물론 이건 결과론적인 분석이다. <추격자>는 여러 영화에 대한 기시감을 불러 일으키지만 매끈한 봉합으로 자신만의 아우라를 만들어낸다. 풍자 코미디와 슬래셔 호러가 사이좋게 노늬는 양상이다. '내가 웃는 게 웃는 게 아냐' 내지는 '웃고 있어도 소름이 끼친다'라는 복합적인 감정을 제대로 건드린다.
동시에 <추격자>는 <우리동네> <가면> <세븐데이즈> 등이 극복하지 못했던 '반전 드라마' 강박관념을 가볍게 물리친다. 중호에게 계속 '추격' 동기부여를 주기 위한 휴머니티 장치(이것은 스포일러)가 끼어들긴 하지만, 이는 드라마를 위한 게 아니라 장르를 극단으로 몰고 나가기 위한 일종의 지지대다. 영민의 구구절절 사연같은 건 없다. '선'인지 '악'인지도 상관없다. 비뚤어진 사회구조의 책임도 굳이 묻지 않는다. 그저 그는 잡혀야 하는 존재이며, 평온한 포주 생활로 돌아가기 위해 여자 인질을 찾아 이 추격을 어서 마무리지어야 하는 중호의 피곤한 상황만이 존재할 뿐이다. 그래서 <추격자>는 '추격'에만 초점을 맞추며 2시간 5분을 종횡무진한다. 이 얼마나 쿨한 만듦새인가.
전개는 쿨하고 인물들은 징하다. 발품을 풀어 구성한 캐릭터와 대사와 상황은 현장감이 넘친다. 언덕배기 주거지인 망원동(촬영은 북아현동)을 십분 활용한 동선은 '한국형 스릴러'로서의 매력을 느끼게 한다('발품'은 제쳐두고 쓸데없이 과장된 세트를 꾸미고 요트까지 동원하며 촌스러운 럭셔리를 지향하신 <무방비 도시>가 고개 숙여 반성해야될 부분이다). <추격자>는 살인의 이유에 대해 일장연설을 늘어놓지 않지만 이틀밤을 관통하는 카메라를 통해 '막장 사회'의 면면을 찰지게 전달한다. <추격자>가 무서운 이유는 무엇인가? 18금 '망치' 살인이 끔찍해서? 끝끝내 밝혀내지 못하는 영민의 심리 때문이다. 한 사람의 어두움은 겉만 보고 판단할 수 없다. 어쩌면 우리 동네에도 악마가 살지 모른다. 처음 중호가 영민을 살인자로 믿지 못했던 것처럼, 악마를 상상하기에 개인의 상상력은 턱없이 부족하다. 상상 이상의 누군가는 사람 이상의 존재감을 갖는다. 경찰도 막을 수 없는 이 연쇄살인범이야말로 사회의 '괴물'인 셈이다.

+ 에피소드 한토막. 시사회 때 맨 끝줄(들어는 봤나 S열)에 앉게 되서 투덜거리고 있었다. 비상구쪽 의자가 비어 있었는데 무대인사를 마친 나홍진 감독이 떡하니 그 자리에 앉는 게 앉았다. "아뉘, 왜 배우들과 안 앉으세요?"(참고로 시사회에서 배우들은 가운데 중 가운데 자리)라 물었더니 털털한 목소리로 "영화 보다가 화장실을 잘 가서요"라고 말씀하시는. 감독이 옆에 앉았으니 신경쓰면서 볼만도 한데, 완전 몰입이 되서 몇 분뒤 그의 존재를 까맣게 잊었다. 나중에 보니 끝까지 앉아 계시더라. 좀 재미있는 캐릭터로 기억에 남을 듯.


* 이글은 제 개인 블로그 ncreep.egloos.com과 동일합니다. 새로운 생산에 게을러서 죄송.
Posted by marsgirrrl