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ibm x31. 벽돌, 아니죠~. 노트북, 맞습니다~.

머리 끝부터 발 끝까지 샤넬로 휘감은 여자는 권위를 중시하고 클래식을 사랑하는 업타운 레이디고, 디올이나 돌체 앤 가바나를 입은 여자는 화려하고 섹시하며, 비비안 웨스트우드는 자유분방한 펑크걸의 아이콘이라는 식으로, 특정 패션 브랜드들은 그것을 소비하는 자체만으로도 사람들의 이미지를 고정시키고 범주화하는 역할을 한다. 어디 패션만 그렇겠나? 청담동에서 8천원짜리 커피를 마시는 여자와 커피빈 쿠폰을 열심히 채우는 여자와 지하철 자판기 커피를 마시며 위생을 걱정하지 않는 여자, 그리고 '궂은 비 내리는 날 그야말로 옛날식 다방에 앉아' 맥심 커피를 마시는 여자에 대한 타인들의 시선은 모두 제각각이며, 우리의 소비는 때로, 아니 대부분, 제품 자체의 질보다 그런 시선과 이미지에 좌우된다.

제품에 대한 정보나 식견, 취향이 부족할 때, 타인의 시선과 이미지라는 요인은 보다 노골적으로 소비자의 선택에 영향을 미친다. 시선과 이미지에 신경을 쓴다는 것은, 정치의 'ㅈ'자도 모르지만 돈 많고 보수적인 아저씨들은 한나라당을 지지하고 왠지 반골 기질 있는 아티스트들은 민노당을 지지하기에 '그럼 나도 민노당' 해버리는 것과 비슷하게, 특정 제품의 소비자 그룹이 가진 특성과 가치관에 동조하는 행위이기도 하다. 강남에서 인천까지 먼길을 달려 업어온 나의 ibm x31을 보고 일명 '소니빠'인 언니가 혀를 끌끌 찰 때 내가 의연할 수 있었던 것도, 컴퓨터라곤 워드와 인터넷밖에 할 줄 모르는 내가 그 물건에 대한 뭔 소신이 있어서라기 보다, 언니 표현을 빌면 '신소재 건축 마감재' 혹은 '시커먼 벽돌'처럼 생긴 x31을 '명품 노트북'이라고 추켜세우는 해당 유저들의 성향에 깊이 매료되어서다.

컴퓨터 중고 장터를 보면 불량화소나 외관상의 흠집 하나에 가격이 뚝뚝 떨어지고, 어디 금간 데라도 있으면 당장에 고물 취급을 하고, 성능과 하등 관계 없는 박스 보관 여부로 판매자의 성의를 가늠하곤 한다. 하지만 ibm 유저들은 담대하다. '상단 배젤에 크랙 있습니다.' '액정에 5cm 정도 흰 멍 있습니다.' '자판 번들거림 있습니다.' 정도 멘트는 인사성으로 오가고, 마티즈를 스포츠카로 튜닝하는 자동차 광들처럼 구형 노트북에 총력을 기울여 듣도 보도 못한 사양으로 업그레드 해놓고 자기들끼리 감탄하며 신형 노트북 맞먹는 가격에 사고 팔기 예사다. 유저들 중에 유독 공대생이나 연구원들이 많고, ibmmania 사이트 같은 곳에서 이따금 여성 회원이 발견되면 8차선 고속도로로 뛰어든 멸종위기생물이라도 되는 양 호들갑을 떠는 것도 왠지 신뢰를 더하게 했다. 진료는 의사에게, 약은 약사에게, 컴퓨터는 '공돌이'에게, 라는 게 나의 철학이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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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티브 잡스가 신제품 발표회 때 서류봉투에 담아와 화제가 된 맥북 에어.


'내건 다 예뻐야돼'라는 친절한 금자씨 마인드인 언니는 한동안 '소니빠'를 지향하다 지금은 '애플 맥북 에어'에 꽂혀 호시탐탐 기변을 노리고 있다. 반면 '기계는 기계다워야 한다' 주의인 나는 43만원에 구입한 중고 노트북을 '까짓 깨질 테면 깨져라' 하고 케이스도 없이 가방에 넣어다니며 막 굴리고 있다. 언니는 백화점에서 200만원이나 주고 덜컥 구입한 소니 노트북의 용량이 적어 짜증난다며 나의 100만원짜리 중고 후지쯔를 마르고 닳도록 빌려 쓰던 것처럼, 앞으론 맥북 에어를 관상용으로 모셔두고 x31에 묻어가려는 모양이다. 

어느 ibm 유저는 새 노트북을 사서 과사무실에서 뻐기듯 꺼냈더니 여자 후배가 "선배, 노트북 바꿀 때 됐나봐요?" 그랬다고 한다. 이해한다. 단순하다 못해 투박한 ibm의 디자인은 아무리 봐도 여자들이 좋아할 스타일은 아니다. ibm 노트북을 쓰는 여자, 지금껏 주변에서 딱 두 명 봤다. 그 중 한 명은 패션 에디터였는데, 공대 나와서 연구소 다니는 남편의 추천이라고 했다. 난 그녀가 원피스에 모피 코트를 입고 사무실에 앉아서 시커먼 ibm 노트북을 상대하는 모습이 늘 보기 좋았다. 예뻐야 할 건 예쁘게, 튼튼해야 할 건 튼튼하게, 옷은 옷답게, 기계는 기계답게, 그 마인드가 맘에 드는 거다. 그러니까 ibm 노트북을 중고로 사는 여자라고 해서, 칙칙한 괴짜일 거라 상상하면 곤란하단 말이다.

Posted by 알 수 없는 사용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