반짝이는 건 은수저부터 껌종이까지 죄 둥지로 물어나르는 까마귀처럼, 할인매대에 누운 옷들을 게걸스레 긁어모은다. 그게 시작이다. 그러다 점차 옷걸이에 걸린 옷들로 눈이 가고, 제몸에 맞는 핏을 찾아내고, 웬만하면 자신을 실망시키지 않는 브랜드 몇가지를 골라 충성하는 단계가 온다. 다음은 구두다. 그 다음은? 가방? 혹자는 옷-구두-가방-속옷-시계-주얼리가 패션 마니아 혹은 패션 신불자로 가는 수순이라고 말한다. 그렇다면 그 다음은? 붓글씨의 대가가 종국엔 괴발개발 어린애 낙서로 돌아가곤 하는 것처럼, 지름의 끝에 이르면 물욕이 일지 않는 무념무상의 경지가 펼쳐질까?

뉴욕에 온 지 두 달만에 빈티지 숍과 디스카운트 스토어를 돌며 야금야금 사들인 신발이 벌써 6켤레. 그전까지 평생 내 돈 들여 산 신발 수와 맞먹는다. 어젠 급기야 상품권 남발하는 웬만한 국내 가죽 브랜드 제품한 가격인 30% 세일가에 나온 마크 바이 마크 제이콥스와 클로에의 가죽 백들을 보며 30분간 똥 마려운 강아지처럼 진열대 앞에서 안절부절 못하다가 눈물로 작별을 고하고 돌아섰다(안녕 마크, 안녕 클로에, 언니가 돈 많이 벌어서 데리러 올게, 라고 한국말로 소근대는 날 보며 센추리21의 흑언 언니는 몹시 의심스런 표정을 지었더랬다). 물론 가장 큰 이유는 돈이 없어서다. 그렇다고 이 불타는 물욕을 잠재울 자신은 또 없기에, 가격 대비 가장 효율적인 쇼핑을 곰곰 연구했다. 결론은, 이런저런 자질구레한 것들을 사고 또 사봤자 결국엔 눈만 살살 높아져 끝없이 돈을 써댈 테니, 차라리 엄청 비싸면서 절대 유행을 타지 않는 궁극의 물건을 하나 갖고 나머진 잊자는 거다. 그리하여 난샤넬백을 사기로 마음 먹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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샤넬 2.55백. 사랑하오. 나의 마지막 가방이 되어주겠소?

차라리 에르메스를 사지 그러냐고 비웃지들 마시라. 월급생활자의 로망이란 한계가 있는 법이다. 그렇다. 난 패셔너블하지도 않은 주제에 패션 신불자의 수순을 밟고 있다. 이십대 중반까진 상하의 각각 두 벌로 한 계절 나면서도 기죽거나 남 부러운 적 한 번 없었다. 주머니에 땡전 한 푼 없는 날도 많아 별명은 천년빈대 만년식객.’ 그러나 사회생활이랍시고 만나는 사람들에게 눈총 받기 싫어 TPO별 아이템을 구비하고, 이젠 또 나이가 있으니 너무 허름한 차림새는 곤란하다 싶어 철마다 의복을 개비하고, 사람 기분이란 게 만날 다른데 스타일은 어떻게 하나겠냐며 이것저것 시도하다 보니 또 옷장이 미어지고, 쇼핑 한 번 할 때 제대로 하자 싶어 잡지도 보고 시장조사도 했더니 세상에 예쁜 건 또 왜 이렇게 많아? 그리하여 내 인생 이 지경이 된 거다.

20년 전 담배를 끊은 어느 중년 아저씨가 최근 했다는 말. “난 담배를 끊은 게 아니다. 단지 20년 동안 참고 있을 뿐이다.” 그러매 생각컨대, 한번 맛 들이면 절대 끊을 수 없는 것 네 가지는 담배와 마약, 고기, 그리고 쇼핑이더라. 이젠 다시 상하의 두 벌로 한 철 버티는 삶으로 돌아갈 수 없으니, 어쩌면 난 남은 평생 카드 회사와 패션 브랜드들을 먹여 살리기 위해 소처럼 일해야 할지도 모른다. 아직 통장에 현금이 있고 여차하면 장사 밑천으로 쓸 전세보증금이나마 남았을 때 대책을 마련해야 한다, 요런 절박함이 요즘 부쩍 자주 엄습한다. 아예 지름의 끝을 보자, 라는 건 현재 찾은 유일한 해법이다. 물론 전제는 비싼만큼 오래오래 질리지 않는 물건이어야 한다는 거다. 그러니까 샤넬백, 니가 클래식이든 사치품이든 이젠 상관없어, 가보자 갈 때까지.

p.s. 샤넬 매장을 지척에 두고 아직 출동하지 않은 단 한 가지 이유는, 혹시 지름의 끝이 내가 상상하는 그런 경지가 아님 어쩌나 하는 일말의 두려움 때문이다. 샤넬백으로도 마크와 클로에의 결핍이 주는 공허를 달래지 못하면? 내 평생 남은 모든 간절기 코트와 맞바꾸기로 한 버버리의 베이지색 트렌치 코트도, 같은 이유로 아직 지르지 못했다. 남미 두어 개국 여행 예산과 맞먹는 그 아이템들을 훅 지르러 나서기 전에 누군가 무릎을 탁 칠만큼 타당한 이유로 나를 설득해준다면, 차라리 뉴욕 모든 매장에서 그 아이템들이 품절이면, 아니 내일 아침에 길을 나서다 눈먼 돈가방이라도 줍는다면 좋겠다. 뭣보다 큰 바람은, 돈 버는 게 딱 쓰는 것만큼만 쉬웠음 좋겠다는 거다.

Posted by 알 수 없는 사용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