7호선의 두 여자

난달은 짐을 싸느라 몹시 분주했다. 우선 전세계약이 만료되어 이사를 해야 했고, 이직 계획에 따라 회사를 옮겨야 했다. 태생적으로 새로운 환경에 쉽게 적응하지 못하는데, 먹고 사는 터전과 본거지를 동시에 옮기느라 적잖이 애를 먹었다. 준비하던 과정, 옮길 채비를 하던 동안의 수고로움을 채 열거하지 않더라도 몹시 피곤하고 또 불안했다.
지만 보따리를 두 개나 꾸린 덕분에, 출퇴근의 동선은 단출해졌다. 7호선 지하철에 오르면 환승 한번 없이 목적지에 다다른다. 걷는 시간까지 모두 합쳐 집을 나서 회사까지 소요되는 시간은 넉넉잡아 1시간 10분. 아침부터 온갖 향수와 화장품 냄새에 휘둘려야 한다는 것, 인파 속에 파묻혀 40분 동안 꼼짝달싹 못하는 것이 달갑지는 않지만 그런대로 견딜 만하다.
원 지하철을 타고 저마다의 일터로 향하는 사람들의 표정은 대체로 어둡다. 그건 아침햇살이 찬란한 뚝섬역을 지날 때도 마찬가지이다. 지하를 벗어나 이제 막 교상역과 마주한 그 잠깐의 보너스 같은 차창 밖 풍경에도 사람들은 떼꾼한 눈으로 휴대폰의 화면이나 무가지를 들여다보느라 여념이 없다.
자를 보는 대신, 나는 여자를 관찰한다. 잠이 덜 깼어도 예쁜 여자를 바라보는 건 자몽과즙을 마시는 것처럼 상쾌한 일이다. 하지만 지하철 승객 중 상당부분은 생활 전선에서 온몸을 불사르는 투사처럼 강인한 인상이다. 오십대로 보이는 그녀 또한 그랬다. 그 좁은 공간을 헤집고 들어선 뒤 기어이 노약자석 앞에 선 그녀는 지구의 역사가 시작할 때부터 이미 그 좌석의 주인인양 당당하게 이미 자리에 앉아있던 여고생을 일으켜 세웠다. “이봐, 학생, 좀 일어나. 나 좀 앉게.” 화들짝 놀란 표정으로, 여고생은 머쓱하게 자리를 내주고 말았다.
리를 강탈한 아주머니는 고맙다는 말 한 마디 없이 식전 댓바람부터 어딘가로 전화를 걸어 목청껏 떠들었다. 무엇이 그녀를 그토록 억세고 경우 없이 만든 것일까. 살아온 세월이 힘겨워서 그랬을 거라고, 험한 세상과 대적하느라 적당히 몰염치해졌다고 치부하더라도, 그녀의 태도는 무모할 만큼 자기중심적이다. 모진 세월을 견뎠으면서도 충분히 넉넉하고, 다른 사람에게 너그럽고, 아침의 만원 지하철을 탔어도 식은땀을 흘리는 누군가에게 자리를 내줄 수 있는 그런 어른들을 나는 알고 있다. 그건 교육의 혜택을 충분히 받고 안 받고의 문제만은 아닌 것 같다. 어디까지나 그건 ‘마음’의 문제이고, ‘생각’의 문제라고 생각한다. 마음과 생각이 온통 자신을 향해 있는 사람으로서 젊은이들로 하여금 어른대접을 기대한다면 그건 분명 잘못된 것이다.
화통화를 마친 그녀는 몇 정거장 못가 사람들을 향해 소리쳤다. “어이, 어이, 거기 비켜, 비겨 서!” 한 발자국 떼지 못할 그 공간에서 과연 어디로, 무엇 때문에 비켜서라는 말인지 아주머니를 향해 되묻는 젊은이는 아무도 없다. “안 보여, 상봉역 안 보여, 그렇게 가리고 섰으면 내가 (전광판이) 안보이잖아!”

현역에 내리면 강남역이나 뱅뱅 사거리 방면으로 가는 사람들이 셔틀버스를 타기 위해 긴 줄로 서있다. 그 한편으로는 택시를 잡아타기 위한 짧은 줄도 보인다. 오늘 아침 나는 ‘택시 쪽’으로 줄을 섰다. 몇 대쯤 떠나보내고 마침내 차례가 왔을 때, 역으로부터 막 뛰어올라선 여자 하나가 내 앞으로 후다닥 끼어들었다. 행렬을 보았을 테니 설마 새치기를 할까 생각했는데, 택시가 당도하자 추호의 망설임도 없이 문을 여는 것이다. 하도 어이가 없고 괘씸해서 그 앞을 가로막았다. “아가씨, 기다리는 사람들 안 보여요? 제가 탈 차례인데요.”
안한 마음에 뒤로 물러설 거란 나의 추측은 여지없이 빗나갔다. “타시면 되잖아요! 잘 하면 한 대 치겠네?” 적반하장이란 말은 이럴 때 쓰는 표현일 것이다. 그 싹수 노란 주둥아리를 양손으로 확 찢어놓고 싶었지만 더이상 택시를 기다리게 할 수 없으니 참을 수밖에. 눈을 부라리며 성을 내던 그녀는 성큼성큼 앞으로 나아갔다. 순서대로 기다리는 행렬 같은 건 아무래도 상관없으니 저 앞쪽에서 자리를 잡고 택시를 먼저 낚아채겠다는 심산이었다. 다른 사람의 기분, 다른 사람의 시간, 다른 사람의 아침 같은 건 내 알 바 아니라는 그녀의 태도는 도대체 어디서 배워 처먹은 것일까.
지옥엽, 너무나 곱게 키워져서 스스로의 싸가지 없음을 모를 거라고, 오늘까지 지각하면 당장 회사에서 잘릴 위기상황에 직면해서 잠시잠깐 몰염치했을 거라고 이해해주려해도, 그녀의 태도는 무모할 만큼 자기중심적이다.
오늘은 밀린 업무를 해결하느라 몹시 분주한 하루였다. 출근 나절 똥을 밟아서일까. 온종일 되는 일이 하나도 없어 일찌감치 정리하고 회사를 벗어났다. 나이가 많든 적든, 지하철 안에서 만났던 밖에서 마주쳤던, 경우 없는 여자들로 인해 또다시 기분 잡치는 경우가 없길 바라며 나선 거리. 강남의 대로는 여전히 여자들로 가득하다. 아침의 기분 같은 건 잊어버리고, 그래서 또다시 행복하다.

Posted by 알 수 없는 사용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