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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 2008.01.03 <스밀라의 눈에 대한 감각>: 얼음에 덴 화상의 뜨거움 3 by 알 수 없는 사용자


에스키모, 아니 '이누이트' 부족이 눈(snow)을 묘사하는 단어와 표현은 수백가지나 된다, 왜냐하면 인간의 언어란 결국 그를 둘러싼 세계를 질료 삼아 빚어지기 때문이다...라고 썼더라면 폼이 제대로 날 뻔 했습니다. 하지만 그럴 수 없었어요. 이게 엄청난 과장이었다는 걸 얼마 전에야 알게 됐지 뭡니까. 실제로 그 사람들이 사용하는 눈에 대한 어휘는 네 개뿐이래요. '하늘에서 내려오고 있는 눈(가나 gana)', '땅에 내려앉아 쌓여있는 눈(아풋 aput)', '바람에 이리저리 휘날리는 눈(픽써폭 pigsirpog)'. '바람에 휘날려 무더기로 쌓여있는 눈(지먹석 gimugsug)', 이렇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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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지만 <스밀라의 눈에 대한 감각>을 읽다 보면, 그게 전부 과장만은 아니겠다는 생각이 듭니다. 이 책의 행간에 깃든 눈과 얼음의 세계는 무한한 바다만큼, 영원한 우주만큼이나 너비와 깊이를 짐작하기 어렵습니다. 페터 회(장난으로 그럼 이 사람은 회페터야? 그럼 회선생이겠네? 응응?” 따위를 부끄러운 줄도 모르고 잘도 주절댔던, 낯선 이름의 덴마크 작가죠)의 문장 또한 얼음물 속에서 뜨거워지는 몸처럼(한겨울에 산에서 냉수마찰 해보신 분들은 이게 뭔 소린지 다 아실 겁니다), 얼음에 덴 화상처럼 차가운 듯 뜨겁고, 폭발적이면서도 서늘합니다. 가장 단정한 수학식처럼 한 단어 한 단어 또박또박 낭비 없이 사용했는데, 어쩐지 읽을수록 서서히 빠져드는, 발가락 끝부터 머리 꼭대기까지 저항할 수 없이 젖어 드는, 매 단어의 의미를 곱씹고 싶은, 무한대로 수렴되는 눈과 얼음의 세계를 남김 없이 알고 싶어 조바심이 나는, 왼쪽에 쥔 페이지가 늘어날수록 오른쪽에 쥔 페이지가 점점 줄어드는 게 안타까워 눈물이 날 것 같은, 그런 글입니다. (인터넷 서평을 읽다 보니 의외로 이 책의 번역을 지적한 글들이 눈에 띄었는데, 나로서는 다소 의아한 일이었습니다. 번역에 꽤나 민감한 편인데도 이 책을 읽으면서 그런 점을 전혀 못 느꼈을뿐더러, 오히려 번역자의 담담한 글 투가 스밀라와 꽤나 잘 어울린다고 생각했거든요.)



사랑에 빠진다는 것은 대단히 과장된 얘기다. 사랑에 빠지는 것은 상대에게 받아들여지지 않으리라는 두려움 45퍼센트와 이번에는 그 두려움이 무색하게 되리라는 광적인 희망 45퍼센트, 거기에 소박하게 사랑의 가능성에 대한 여린 감각 10퍼센트를 더하여 이루어진다. 나는 더 이상 사랑에 빠지지 않는다. 내가 더 이상 볼거리에 걸리지 않는 것처럼. ...(중간 생략)... 나는 사랑에 빠진 적이 없다. 그러기에는 지나치게 명확하게 사물을 바라본다. 사랑에 빠진다는 것은 광기의 한 형태다. 증오, 냉담, 분노, 중독, 자살과 밀접하게 관련되어 있는. - 페터 회, <스밀라의 눈에 대한 감각>


 

: 앞에서 굳이 이누이트 족을 들먹인 이유는, 이 책의 주인공인 '스밀라'가 덴마크의 유복한 의사인 아버지와 이누이트 사냥꾼인 어머니 사이에서 태어난 사람이기 때문입니다. 젠체하는 문명과 무심한 자연의 경계선에 서 있는 존재랄까요. 복잡할지는 몰라도 혼란스럽진 않은 인물 같았습니다. 스밀라 역시 눈처럼, 얼음처럼, 차가운 이성으로 뜨겁게 움직입니다. 그녀는 키 160센티미터에 몸무게는 고작 50킬로그램(그린란드의 강풍과 추위를 생각하면 너무나 왜소한 체격인 겁니다), 사람보다는 눈과 얼음을 신뢰하고 수학의 완벽함을 신봉하는 사람입니다. 또 그녀는 37세의 독신녀입니다. 그러나 그녀를 움직이게, 어떤 사건에 뛰어들게 한 것은 이웃집 아이의 죽음이었어요. 가장 의외의 순간에 따뜻한 속내를 보일 것 같은 사람, 실연 당했다고 질질 울면서 찾아가면 같이 침 튀기며 비열한 ex’를 욕하는 대신 끝맺는다는 게 그래같은 건조한 비평을 하고는 시커멓게 번진 마스카라를 닦아주고 자기 침대에 재워줄 것 같은 언니입니다.

실은 이 책을 읽었던 2005년의 기분이 그랬어요. 책 소개에 보면 추리소설로서의 매력뿐만 아니라 미스터리와 로맨스, 스릴러, 문명 비판, 철학적 통찰 등 각 장르의 요소들을 적재적소에 구현하고 있는 작품이랍디다마는, 그 무렵 가망 없는 감정에 허덕이던 눈에는 유독 사람과 사람 사이, 관계, 그 너머로 흐르는 시간, 불가항력적이고 불가해한 것, 사랑이라고도 할 수 있는 것, 그런 구절들만 밟혔습니다.    



나는 결코 수리공을 알았던 게 아니었다. 몇 시간 전까지 나는 우리가 침묵으로 맺어진 유대감의 순간을 공유했다고 생각한다. 그가 그린란드 스타의 승강대를 가로질러 걸어가는 것을 보았을 때 나는 우리가 언제나 낯선 사이였다는 것을 깨달았다. 젊었을 때는 섹스가 친밀감의 정점이라고 생각한다. 나중에 섹스는 거의 시작에 미치지도 못한다는 것을 발견하게 된다. - 페터 회, <스밀라의 눈에 대한 감각>



: 어쩌면 나는 이 책을 완전히 오독하고 있는 것인지도 모릅니다. 나는 이 책을, 살인 스릴러가 아니라 철학적인 로맨스로 읽었습니다. 적어도 내게는 그랬으니까요. 그렇지 않았다면 그 두꺼운 책 어딘가에서 가슴이 뻐근해지는 일도 없었을 테고, 지하철 4호선의 어딘가에서 남몰래 눈물을 훔치는 일은 더더구나 없었을 거예요.



살은 빠져서 수척한 수준에서 깡마른 수준으로 바뀌고 있다. 잠은 모자라 눈은 눈구멍 속으로 퀭하니 패어 있다. 하지만 아직도 나는 거울 속의 낯선 사람을 보고 미소짓는다. 인생에서의 행복과 슬픔의 분포는 간단한 산수로 얻을 수 없고 표준 할당 같은 것도 없다. 인생을 살 만한 가치가 있게 해주는 몇 안되는 사람들 중의 하나가 크로노스호에 타고 있다. - 페터 회, <스밀라의 눈에 대한 감각>



; 끝내준다능, 오나전 킹왕짱이야. 우왕ㅋ굳ㅋ … 이렇게 호들갑을 떨 마음은 없었습니다. 그렇게 보이고 싶지도 않았습니다. (이미 늦었는지도 모르지만요.)    




내 어머니가 돌이오지 않게 되었을 때, 나는 어떤 순간도 마지막이 될 수 있다는 것을 깨달았다. 인생의 어떤 것도 단순히 한 장소에서 다른 장소로 가는 통로가 될 수는 없다. 마치 남겨놓고 가는 유일한 것인 양 매 걸음을 떼어야 한다.
- 페터 회, <스밀라의 눈에 대한 감각>



: 2005
1228
의 일기를 꺼내봤습니다. 아마 <스밀라…>를 다 읽었거나, 최소한 절반 이상 읽은 날이었겠죠. 위의 대목을 발췌해놓고 이렇게 한 줄 썼더군요. “아아, 이 책을 이제서야 읽게 되다니. 슬프다. 기쁘다.”


Posted by 알 수 없는 사용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