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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 2007.11.28 <피버피치>: 팬이 된다는 것 2 by 알 수 없는 사용자
"나는 축구와 사랑에 빠지고 말았다. 마치 훗날 여자들을 만나 사랑에 빠지게 될 때처럼, 느닷없이, 이유도 깨닫지 못한 채, 맹목적으로 축구에 빠져들고 만 것이다. 그 사랑 때문에 앞으로 겪게 될 고통이나 분열 상태에 대해서는 안중에도 없었다."
- 닉 혼비, <피버피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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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지막 순간까지 책 사는 걸 망설이게 했던 이 책의 표지는, 이렇습니다.



: <어바웃 어 보이>, <하이 피델리티('사랑도 리콜이 되나요'라는 부끄러운 한국어 제목으로 둔갑했던 영화)>의 원작자인 닉 혼비는 알만한 사람은 다 아는 강박적인 축구팬입니다. '축구팬들이 다 그렇지'라고 아무렇게나 말해버릴 비(非)축구팬에게는 이렇게 말하고 싶습니다. "님하, 워-워." 이 사람의 상태는 꽤나 심각하단 말입니다.  


"딱 한 번의 예외라면, FA컵 경기였던 웨스트브롬 전이었다. 내가 축구장에 가지 않더라도 이 경기에서만큼은 아스날이 꼭 이기기를 바랐건만, 1-0으로 지고 말았다. (경기가 수요일 밤에 있었기 때문에 나는 결과가 나오기 전에 자러 가야 했다. 그래서 아침에 일어나자마자 볼 수 있도록 어머니가 종이에다 스코어를 써서 책장에 붙여놓으셨다. 나는 그 종이를 한참 동안 빤히 쳐다보았다. 어머니가 써놓으신 숫자를 보고 배신감을 느꼈다. 어머니가 나를 사랑하신다면, 분명 그보다 나은 스코어를 써놓으셔야 했다. 숫자 뒤에 붙은 느낌표도 스코어만큼이나 잔인했다. 느낌표라니, 그것은... 마치 친척의 죽음을 강조하기 위해 느낌표를 붙여놓은 것처럼 부적절하게 느껴졌다. '할머니는 주무시다가 평화롭게 돌아가셨다!' 당시 나는 이런 실망감이 아주 새롭게 느껴졌지만, 지금은 다른 모든 팬들과 마찬가지로 익숙해졌다." -닉 혼비, <피버피치>


: 열두어살 때 부모님의 이혼을 겪은 닉 혼비는 혼곤한 어린 마음을 고스란히 축구에 던져 넣습니다. 축구와 정서적으로 너무 뒤죽박죽 얽힌 나머지, 그는 자신의 인생이 아스날팀의 경기 결과와 함께 흘러간다는 망상에 사로잡힌 어른으로 자랍니다. 그의 대뇌 한 구석에는 언제나, 무슨 일을 하건, 슬그머니 또아리를 튼 축구가 고개를 내밀고 있습니다. 막 잠에서 깬 여자친구가 달콤한 목소리로 "지금 무슨 생각해?"라고 물었을 때, 친척의 결혼식이나 조카의 세례식에 참석할 수 없는 이유를 설명해야할 때, 혹은 인생 최악의 슬럼프에 빠진 이유를 고민할 때면, 그의 머릿속에서는 '축구'가 거대한 전광판에 아로새겨져 형광빛 네온사인을 번쩍거리는 겁니다. 그의 표현을 빌리자면, '축구 경기가 불러일으키는 흥분은 제 정신과 상식을 포함한 모든 것을 집어삼켜 버린다'는군요.


"사실 나는 아버지에게 이렇게 말씀드렸어야 했다.
"저기요, 홈에서 보통 리그 경기를 볼 때도 저는 아스날이 질까 봐 너무너무 두려워서 말도 못 하고, 생각도 못 하고, 때때로 숨조차 제대로 쉴 수가 없거든요. 만약 스윈든이 백만 분의 일이라도 이길 가능성이 있다면, 아버지는 지금 저를 데리고 집으로 돌아가시는 게 좋을 거예요. 저는 그 충격을 감당할 수 없으니까요."
내가 그렇게 털어놓았더라면 아버지가 나를 데리고 경기장 안으로 들어가는 것은 상식에 어긋난 행동이 되었을 터이지만, 나는 그냥 궁금한 척, 어느 쪽이 이길 것 같은지 여쭤보았다. 아버지는 다른 사람들처럼 아스날이 3-0이나 4-0으로 이길 것이라 생각한다고 하셨으므로, 내가 원하던 확답을 얻은 셈이었다. 그래도 나는 죽을 것처럼 두려웠다. 어머니가 써놓으신 스코어 뒤의 느낌표에 이어, 아버지의 경솔한 확신도 나를 배신할 것만 같았다."
- 닉 혼비, <피버피치>


: 저는 야구팬입니다. A매치 축구경기는 열을 내며 시청하고, 상암 월드컵 경기장에도 두어 번 가서 끈적한 땀과 흥분한 침을 흩뿌렸지만, 그건 그저 옆집 아이의 머리를 쓰다듬어 주는 젊은 어머니의 자세였달까요. 아무렴 내 새끼가 이쁘지, 옆집 애가 더 귀하겠습니까. 야구 시즌이 끝난 11월부터 다음해 3월까지의 공백은, 제게 그저 무고한 나무의 시체로 만든 5장의 달력일 뿐입니다. 그렇다고 야구 시즌 중에도 마냥 꽃분홍 뭉게구름 같이 행복한 나날만 계속되는 건 아닙니다. 좀 더 구체적으로 말하자면 야구에는 아량곳 하지 않고 도도히 흘러가는 세상을 원망하는 나날이 계속됩니다. 야구 경기도 없는 월요일에 왜 방송 3사는 버젓이 스포츠 뉴스를 방송하는 걸까? 일주일 중 삶의 의욕이 가장 저조한 날을 조롱하는 의미에서? 어째서 9시 뉴스의 앵커는 코나미컵 일본전에서 19세 광속구 투수 김광현이 통한의 투런 홈런을 맞은 날에도 "참으로 어처구니 없는 일이 아닐 수 없습니다!"라는 비분강개를 오프닝 멘트로 선택하지 않을까? 1년에 딱 하루 있는 올스타전 중계를, 앞의 식전 행사 뛰어 넘고 뒤의 경기 끝자락 잘라먹으며 방송하는 SBS 방송국 따위는 애저녁에 폭파 시켰어야 하는 거 아닌가? 포스트 시즌에도 평소처럼 밤에 잠을 이루거나 궁둥이를 의자에 무사히 붙여둘 수 있는 냉혈한들은 야구팬들의 혈관을 타고 흐르는 혁명적 기운을 감지한 정부 비밀 기관의 사주로 강철 심장 이식 수술이라도 당한 걸까? 대체, 어떻게, 야구 앞에서 태연할 수 있을까!


"팬이 된다는 것에 대해 내가 확실히 알고 있는 것 한 가지는 이것이다. 겉보기와는 반대로, 팬이 된다는 것은 대리 만족이 아니며, 구경을 하느니 직접 축구를 하겠다는 사람들은 핵심을 제대로 파악하지 못한 것이다. 축구를 보는 것은 결코 수동적인 활동이 아니며, 실제로 뛰는 것과 마찬가지다. 물론 에어로빅의 차원에서 하는 이야기는 아니다. 경기를 보면서 담배를 뻑뻑 피워대고, 경기가 끝난 다음 술을 마시고, 집에 돌아가는 길에 칩스를 먹는 일에는 그라운드를 뛰어다니는 운동 효과가 없기 때문이다. 그러나 승리했을 때 느끼는 만족감은, 그라운드의 선수들로부터 뿜어져 나와서 창백하고 지친 표정으로 응원석 구석에 서 있는 우리 같은 사람들에게 희석되어 전달되는 것이 아니다. 우리가 느끼는 기쁨은 선수들이 느끼는 기쁨에서 뭔가 함량이 빠진 것이 아니다. 비록 골을 넣고, 웸블리의 계단을 올라 다이애너 확태자비를 만나는 것은 그들이지만 말이다. 이럴 때 우리가 느끼는 기쁨은 남의 행운을 축하해 주는 것이 아니라, 우리의 행운을 자축하는 것이다. 재난에 가까운 패배를 겪고 났을 때 우리를 집어삼키는 슬픔은 실은 자기 연민이며, 축구가 소비되는 방식을 알고 싶은 사람이라면 무엇보다도 이 사실을 깨달아야 할 것이다." - 닉 혼비, <피버피치>
 

: 팬이 된다는 것은, 결국 이런 겁니다. 비이성적이고, 미성숙한 편애를 밥 먹듯 하며, 무엇으로도 설명되지 않는 일체감으로 행복과 불행을 맛봅니다. (그렇다고 야구장에 널브러져 소주팩을 들이켜다가 "야, 때려쳐라!"를 고래고래 소리지르는 게 잘하는 짓이라는 뜻은 아닙니다) 경기에서 졌을 때 느끼는 상대적 박탈감은, 2위 팀과 꼴찌팀 팬들에게 똑같이 쓰라립니다. '져도 멋진 경기'란 철든 사람, 즉 잠실 야구장 근처를 지날 때에도 심장 박동이 2배속으로 뛰어오르지 않고 상대팀 홈런 타자에게 동물의 이름을 섞은 욕설을 퍼붓는 일도 없는 사람에게나 가능한 개념이니까요. 스포츠팬이 종종 다혈질의, 통제불능의, 앞뒤 안가리고 무식한 어린애 취급을 받는 것도 다 이런 이유에섭니다.
자, 이야기가 길었습니다. 요는 이겁니다. 혹시 스포츠 팬이십니까? 반갑습니다. 이 쌀쌀맞은 세상, 우리 한 번 어울렁더울렁 의지해 살아봅시다.
혹시 스포츠 팬이 아니십니까? 님하, 관심염. 지금 이 순간에도 당신의 야구팬(혹은 축구팬, 혹은...etc) 남자친구는 소란스러운 소외감에 조용히 몸을 떨고 있을지도 모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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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책은 두번에 걸쳐 영화화 됐습니다. 왼쪽은 심란한 헤어스타일의 콜린 퍼스가 주연한 1997년작, 오른쪽은 축구팀 아스날을 야구팀 보스턴 레드삭스로 바꿔 만든 2005년작입죠.



* 이 글의 사소한 일부는 <W KOREA> 2005년 7월호에 기고했던 글에서 가지고 왔습니다.
    
Posted by 알 수 없는 사용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