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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 2008.01.06 우리 생애 최고의 순간 10 by marsgirrr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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배우들, 애썼다!


아테네 올림픽 당시 최고 기대 종목은 다름아닌 축구였다. 2002년 월드컵 4강까지 올랐던 축구가 국민적 기대와 상관없이 덜컥 메달순위권에서 멀어져버렸고, 심심하던 기자들은 꾸역꾸역 이기고 있던 여자핸드볼에 관심을 갖기 시작했다. 급기야는 2004년 8월 29일 결승전에 다다랐다. 후반 막판에 동점, 연장 전후반 동점, 결국 승부던지기까지 이어졌다. 안타깝게도 은메달로 확정됐지만, 땀으로 범벅이 된 선수들의 모습이 그렇게 감격스러울 수가 없었다. TV 카메라 앞에서 눈시울 적시던 남자 감독은 비인기 종목의 서러움까지 북받쳐 더이상 말을 잇지 못했다.

<우리 생애 최고의 순간>(이하 <우생순>)은 본 사람이라면 절대 잊을 수 없는 그 경기, 2004년 아테네 올림픽 여자핸드볼 결승전을 소재로 한 영화다. 쉽지 않은 선택이다. '한국에서 스포츠 영화는 안된다'는 말은 지금까지 절대명제였고, 더군다나 핸드볼은 농구나 축구처럼 화려한 테크닉을 자랑하는 역동적인 스포츠가 아니다. 초점은 역시나 드라마다. 임순례 감독이 프로젝트에 합체하면서 '아줌마'라는 화두가 떠올랐다. 영화적 드라마 장치를 세운건 <화려한 휴가>의 나현 작가였지만, 마무리는 임순례 감독의 몫이다.

영화의 주된 축은 미숙(문소리)와 혜경(김정은)이다. 서른 넷 동갑의 핸드볼 선수인 두 아줌마의 인생여정은 아주 많이 다르다. 미숙은 소속 실업팀이 해체되서 개별 사원으로 재고용한다는 숙연한 감독에 말에 "그래도 정규직이겠지?"라며 '아줌마9단'다운 눈치없는 발언을 날린다. 남편의 빚에 허덕이면서 애 하나 키우기도 더럽고 치사한 상황. 돈도 안되는 핸드볼이 눈에 들어올 리 없다. 그녀 생각에 자신은 한마디로 '돈도 안되는 재능'을 갖고 태어난 참 박복한 년인 셈이다. 반면 좀 있는 집 자식처럼 보이는 혜경은 가방끈 늘인 다음 일본에서 감독으로 활동했다. 아이 하나 있는 이혼녀지만 생활은 어렵지 않다. 더군다나 능력을 인정받아 아테네 올림픽 국가대표팀 감독대행으로 스카웃되어 한국에 돌아온다. 그야말로 '알파녀'의 원조격인 아줌마다. <우생순>에서 계속 갈등으로 내세우는 건 미숙의 삶과 혜경의 커리어가 부딪히는 부분이다. 곧 이들이 함께 맞서야할 새로운 편견이 등장하니, 바로 '아줌마'다. 신인 선수들의 눈총과 나름 권력자들인 협회 남자들 앞에서 삼십대 아줌마들은 똘똘 뭉쳐 버린다. 그리고 여기에 끼어드는 코드 하나가 '한국형 핸드볼'이다. 90년대를 휘어잡았던 여자핸드볼의 자랑스러움은 테크닉이 아니라 '억척스러움'이었다는 사실. 새시대의 새로운 사람들은 계속 '선진화' 운운하며 세련된 방향을 요구하지만 아줌마들은 그런 거 모른다는 듯 개무시하고 몸에 익은 고전적 방식을 고수한다. 그리고 '시크한' 요즘 사람들에게 묻는다. 억척스럽게 사는 게, 그렇게 나빠?

<우생순>에서 가장 생소하면서 반가운 지점은 '핸드볼'이 아니라 '아줌마'다. 남자들의 하소연만 가득하던 스크린에 아줌마들의 삶이 대놓고 등장하는 것이다. 이들은 가정에서도 직장에서도 일인자가 아니다. 명예에 대한 욕심도 없고, 그냥 할 줄 아는 게 핸드볼 뿐이다. 후반의 핸드볼 경기는 남자들의 스포츠 영화만큼 비장하지 않다. 애국심? 그런 거 없다. '그냥 재미있어서 해요'라는 취미생활의 진화도 아니다. 그냥 여자들끼리 함께 모여 무언가를 해낸다는 소박한 의지가 빛날 뿐이다. 단지 포기하기 싫어서. 남에게 지기는 죽어도 싫어서.
한국 아줌마들의 이런 '무목적적' 도전정신이 일면 불편한 건 사실이지만, 그래도 같은 여자로서 연민은 느낄만 하다. 그들은 취미로 스포츠를 즐길 만큼 여유로운 시대의 세대가 아니었기 때문이다. 핸드볼에 회의하던 미숙은 예전 감독이 가르치는 초등학교를 찾아가 핸드볼을 하던 여자아이와 잠깐 대화를 나눈다. "핸드볼 재미있어?" "재미있어요." 어쩌면 그녀의 다음 세대는 핸드볼의 '재미'를 찾을 수 있을지도 모른다. 어쩌면 그녀는 자신도 모르는 사이 누군가의 모범이 될 수 있을지도 모른다. 영화로도 만들어질만큼.

<우생순>이 영화적으로 잘만든 영화일까? 꽤 열심히 만든 장르영화라고는 할 수 있다. 나현 작가는 <화려한 휴가>처럼 가능한 갈등들을 솜씨좋게 배열했다. 지루함을 방지하는 조연의 배치(김지영과 조은지)도 별반 다르지 않다. 그래서 <우생순>은 임순례 영화들 중 가장 장르적이고, 가장 단순하고, 가장 억지스럽게 감동을 불러 일으킨다. 임순례는 한번도 자신의 영화에서 영악하게 눈물을 요구한 적이 없다. 그러나 <우생순>은 실화의 힘까지 보태져 막판 대감동의 물결을 만들어낸다. 하지만 임순례가 아니었다면 애정을 가지고 이렇게 열심히 아줌마들을 쓰다듬어주지 못했을 거다.
결국 이 영화가 얻은 것은 무엇일까? 스포츠 영화도 재미있을 수 있다는 것, 그리고 아줌마들의 이야기도 가치 있다는 점이다. 임순례 영화치곤 다소 실망스럽지만 이런 장점들 때문에 <우생순>을 욕하긴 쉽지 않다. 여자 입장에선 더더욱 그렇다.

+ 쓰다 보니 길어졌어요. 죄송.(계속되는 티스토리 에러로 더 고생)
+ 그럼에도 불구하고 사족. <우생순> 인물같은 아줌마들 일상에서 만나면 굉장히 피곤할 것 같아요. 지하철 자리 하나 놓고 심하게 경쟁하실 분들로 보이거든요. <우생순>은 그런 아줌마들의 고단함을 한번쯤이나마 생각을 하게 만들어요. 그들이 가진 공동체적 가치와 함께.

Posted by marsgirrrl