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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 2007.12.06 <엠> 장인과 달인 사이 3 by marsgirrrl

TV 프로그램 <생활의 달인>을 보고 있노라면 두 가지 감정이 교차한다. 몇 십 년 동안 한 우물만 파면 '진기명기 쇼'에 버금가는 직장생활을 할 수 있겠다는 긍정적인 희망이 우선이다. 이어지는 절망. 몇 푼 벌어보자고 뛰어들었던 직업전선에서 생존하기 위해 '기계'가 될 수밖에 없었던 빽 없는 아빠, 엄마의 모습이 가슴에 와서 박힌다. 그러니까 <생활의 달인>에 등장하는 분들은 고색창연한 의지를 가지고 한 길 걸어온 '장인'이 아니다. 빨리빨리 돌아가는 경쟁사회에서 살아남기 위해 '달인'이 될 수밖에 없었던 것이다. 언젠가부터 장인 대신 달인이 만연한다는 사실이 한국 사회의 슬픈 징후로 느껴졌다. 정확한 깨달음의 시점은 <엠>을 두 번 보고 온갖 리뷰를 떠들어본 직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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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화관계자들은 이명세 감독을 두고 '장인'이라고 말한다. 어쩌면 장인은 '고집쟁이'의 완화된 표현일지도 모른다. <엠>은 이명세 감독의 고집을 단적으로 보여주는 증거물이다. 그런데 말이다, 냉소적인 사랑 담론을 현실에서 체화하며 살고 있는 아이들에게 '순수'는 비웃음의 대상이란 거다. 첫사랑의 기억을 떠올릴 때마다 내 인생의 착한 시절도 있었다며 내심 흐뭇해하면서도, 유치하고 우습다며 애써 기억을 접는다. "내 기억 속에 끊겨진 필름 한 조각"을 굳이 찾고 싶지 않다는 말이다. 설정뿐만 아니라 <엠>의 영화 구성방식은 더 고집스럽다. 친절하게 떠먹여줘도 모자를 판에 별 영양가도 없는 '떡밥'을 계속 던지다가, 나중에는 추리물이 아니고 멜로라며 뒤통수를 친다! 이미지를 보고 즐기라는데 '아침 드라마'급 이미지만 보고 살았던 사람들이 갑자기 어둠을 이용한 고차원 편집에 눈뜰 리가 없잖아. 게다가 명료한 것 좋아하는 논술세대는 'A는 A다'라는 답을 원하지, 'A는 A일까?'라는 헷갈리는 철학적 질문이 귀찮다. 아, 영화 해석도 5지 선다형으로 만들어달라니깐!


<엠>처럼 이글도 상당히 헷갈리는 전개가 되어버렸지만, 사실 나는 <엠>을 만든 이명세 장인을 욕하려는 게 아니다.(급반전!) 영화를 소개할 때 무조건 '장르'부터 들이미는 게 대세인 지금, 영화 장인보다는 영화 달인만 가득하다. 시대의 흐름에 빨리 적응해야 돈 모을 수 있다는 가르침이 미덕인 사회에서 장인은 불필요한 존재다. 달인이라면 <엠>을 어떻게 만들었을까? <오픈 유어 아이즈>를 할리우드에서 리메이크한 <바닐라 스카이>를 보라. 상업영화에선 장르 배열이 먼저고 미학은 부차적 문제다. <엠>을 본격적인 스릴러로 바꿔놓는다면 주인공의 기억상실 사이로 플래시백 인서트 컷이 날뛰면서 끝까지 미미가 유령임을 발설하면 안 된다. 문제는 이런 장르 복제가 재미를 제외하면 무슨 의미가 있냐는 거다(적어도 재미는 있을 거라는 관객의 원성이 들려온다). 그래서 장인과 달인은 다르다. 오래 일을 하면 머리가 아주 나쁘지 않는 한(!) 일의 속도는 빨라지지만, 그 와중에 깨달음을 얻고 순결한 자세로 득도해 가는 건 쉽지 않다. 이명세 감독은 그런 장인 정신을 쫓는 흔치 않은 사람이다. 때문에 존재만으로도 빛나는 깨달음을 준다. 강조하자면, <엠>의 잘못은 만듦새가 아니다. 장인 영화를 달인 영화처럼 포장해서 안 볼 사람까지 보도록 부추겨놓고 책임지지 않았다는 게 차라리 잘못이다. 오래된 메밀국수집이 리뉴얼 후에 특별 메뉴를 만들더라도, 광범위한 패스트푸드의 인기를 따라잡긴 힘든 거다.


우리는 모든 정보를 뒤섞어 무의식적으로 '생활의 달인'이 되고자 한다. 그러기 위해선 촌스럽던 과거를 빨리 잊어야 한다. 낡은 건물을 부수고 뉴욕 스타일로 다시 짓는다. 매 계절마다 새로운 옷도 필요하다. 스스로 뒤떨어진 존재가 아님을 증명하기 위해 자나 깨나 노력한다. 뛰어난 적응력은 바람직한 가치다. 요령이 좋은 달인은 효율성을 높인다. 하지만 몰아치는 상황 속에서 '진짜 나'를 잊어버리진 않았는지 한번쯤 정신머리를 챙겨 볼 필요가 있다. 이명세란 장인의 존재가, 그리고 그가 만든 영화 <엠>이 지금 던져주는 화두는 바로 이게 아닐까.

P.S 사실 <엠>을 가장 재미있게 보는 방법은 '필름 끊긴 경험에 관한 영화'로 공감하는 것이다. 한 남자가 일식집에서 술먹고 필름 끊겨 필름 찾다보니 첫사랑까지 뒤지게 되더라고 정리하니, 꽤 괜찮은 스토리 아닌가. 이명세 감독은 "이 영화 필름 안 끊겨본 사람들이 싫어하는 것 같아"라는 말씀도 하셨다. 근데 왜 이렇게 예쁘게 봐줘야 하는가, 라고 묻는다면, 만든 성의만큼 성의있게 봐주는 게 예의라고 생각하니까. 그리고 이 영화 보면 볼수록 멋지기도 하다. 이해 못한다고 짓이겨서 버리는 짓은 자신의 무지를 모르는 부끄러운 애들이나 하는 짓. 문학소년의 유치한 놀음에 민망해서 못보겠다는 분은 이 영화가 취향에 안 맞는 것. 그런 사람은 배우에 낚이는 자신을 반성하며 그냥 이런 영화를 안 보면 된다.

+ P.S를 제외한 전문은 매체에 실린 것을 옮긴 것입니다. 하나라도 올리라는 대장님 말에 편법으로 얼렁뚱땅 업로딩합니다. 왜 마감 때는 바쁜데도 지루한 걸까요?


Posted by marsgirrrl