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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 2007.12.02 어디서나 통하는 패션 아이템이란 존재하는가? 2 by 알 수 없는 사용자

1. 12:00 논현동. 오십년 만에 이산가족을 만나도 "안 죽고 살아줘서 고맙다"며 끌어안고 오열하는 대신 "그 옷 어디서 샀냐?"며 대뜸 라벨부터 뒤집어 볼 게 분명한 잡지판 사람들이 한 트럭쯤 몰려들기로 예정된 결혼식.
2. 14:00 신사동. 혹여 내가 결혼이라도 하는 날엔 "신부가 성질 더러운가봐. 하객이라곤 회사 사람들 뿐이야"라는 시댁 뒷담화를 면하게 해줄 한줌 대학 동창들과 1년만에 잡힌 커피 약속.
3. 16:00 홍대. 일하다 친구가 되어 이제 나와는 연애 문제로 속앓이할 때 뇌가 엿가락이 되도록 같이 술을 마셔주는 관계인, 그러나 그들끼리는 서로 모르는 두 지인을 소개시켜주기로 한 저녁 식사 자리.
4. 21:00 W호텔. 동료들과 스테판 폼푸냑 내한 공연 겸 파티에 참석한 후 룸으로 옮겨 파자마 파티.

지난 토요일, 전혀 성격이 다른 네 개의 약속이 잡혔다. 네 자리를 몽땅 아우르긴커녕 당장 결혼식용 의상도 없다. 작년에 스텔라 맥카트니 for H&M 한 시즌 옷을 몽땅 개인소장용으로 매입했다는 한 친구도 막상 입으려면 옷이 없다며 한숨을 짓곤 했지만, 내 경우는 입고 죽을래도 진짜 옷이 없다. 1년 365일을 청바지에 티셔츠 쪼가리, 뻔뻔한 노메이크업으로 일관하는 나로선 그나마 트렌드가 나를 쫓아와 "너의 스타일은...네오 프렌치 시크라고 해두지"라는 격려라도 간간이 듣게 된 게 고마울 정도다.

결국 비오는 금요일, 이태원으로 쇼핑을 나섰다. "그래, 넌 뭘 사고 싶은데?" 이태원 시장의 아주머니들이 그녀 얼굴만 보고도 몇 만원씩 척척 깎아주는 건 예사고, 단속에 걸릴까봐 꼭꼭 감춰뒀던 스페셜 '~st'를 좌르륵 펼쳐준다는, 그리하여 '이태원 MD'라는 별명이 붙은 친구가 묻는다. 글쎄, 뭘 사고 싶은가가 아니라 뭘 살 수 있는가, 혹은 뭘 입을 수 있는가 물어야 하지 않을까. "음, 살 건 너무너무 많지. 만날 청바지만 입는데 요새 다 마르고 닳아서 엉덩이가 시원해. 살이 쪄서 맞는 티셔츠도 없고. 연말도 다가오는데 데이트나 파티룩은 전무하지. 당장 급한 건 내일 입을..." 성격 좋은 이태원 MD는 닥치라고 소리치는 대신 조용히 택시 창밖으로 고개를 돌렸다. 비에 젖은 가로수들을 보며 잠시 상념에 잠긴다. '너희도 헐벗었구나. 꼭 나처럼.'

브라운 톤의 푸대자루형 원피스를 걸쳐 본다. '이건 W00 Bar 보다 구파발 관광 나이트에 더 어울리겠어. 골드 클러치 대신 대파가 삐죽 튀어나온 장바구니가 필수지.' 보풀보풀한 모직으로 된 새빨간 드레스를 힐끔 쳐다 보다 행여 들킬 새라 딴청을 핀다. '이건 완전 크리스마스 에디션이군. 홍대에 입고 가면 시선 제대로 받겠어.' 가슴께가 훅 파인 검정 새틴 원피스를 보며 군침을 흘리다가 정신이 번쩍 든다. '대학 동창(그것도 모두 남자)들이 날 발정난 노처녀로 보는 건 원치 않는단 말이다.'

다음 순간, 내가 무슨 옷에 시선을 주든 꿈쩍도 않고 묵묵히 쇼핑을 하던 MD가 한마디 한다. "너 그거 입어봐." 그때 내 손가락 끝이 닿아 있던 곳은 두툼한 모직 소재의 블랙 미니 원피스. 미니 스커트는 대학 시절 하숙집에 불이 나서 긴급 조달한 구호물자 중에 섞여 있기에 마지 못해 입어본 뒤로 처음이다. 하지만 지금은 겨울, 내겐 롱부츠가 있다. 게다가 옷은 상의 실루엣이 풍성해 나의 육덕진 몸을 용의주도하게 가려줄 테다. 가격도 저렴한 4만5천원. 결국 그것으로 낙점. 쇼핑은 사나이답게, 처음 입어본 옷, 친구가 찍어준 옷으로 단번에 고르고 끝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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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진출처 www.fashi.co.kr

<모직 소재 블랙 미니 원피스 + 검정 레깅스 + 검정 롱부츠 + 골드 이어링 + 스모키 메이크업>에 대한 토요일 사람들의 반응

1. 결혼식: 비비안 웨스트우드의 롱스커트를 입고 온 팀장. "나도 미니 스커트 입고 싶어. 저딴 계집애도 미니를 입는데 왜 난 롱스커트를 입었을까!"
2. 동창모임: 11년 동안 나의 온갖 허름한 모습을 다 본 동기 녀석. "야, 친구들 만나면 소문내줄게. 너 예뻐졌다고."
3. 홍대앞: 일동. "오오오. 왜 진작 이러고 다니지 않았어!"
4. W호텔: "이것은 라운지 파티 룩의 교본이야!"

그날의 교훈

1. 나 자신의 안목을 믿을 수 없는 관계로, 여러번 패션홀릭들과 쇼핑을 다니며 그들이 추천하는 대로 장바구니를 채워봤지만 이번만큼 성공적인 경우는 처음. 여성스러운 로맨틱룩을 고수하는 친구가 골라준 옷들은 민망해서 한번도 입지 못했고, 딱 내 취향의 매니시하고 실용적인 룩을 구사하는 선배가 골라준 옷들은 그녀의 초박형 몸에는 잘 맞을지 몰라도 굴곡 많은 내 몸에는 재앙이나 다름 없었다. 어느 쇼퍼홀릭은 내가 쇼윈도에 눈길만 던져도 "사! 사! 사버려!"라고 치어리딩을 해댔으며, 아무래도 내 취향은 아니지만 기껏 쇼핑을 도와달라고 모셔왔다가 거절하기 민망해서 누군가의 권유대로 산 옷들은 지난 여름 아름다운가게에 몽땅 기증했다. 좋은 옷을 고를 자신이 없다면, 좋은 옷을 골라줄 친구를 신중하게 고를 것. 2. 블랙 미니 드레스는 패션의 만병통치약이다, 라는 건 뻥이 아니었다. 장례식부터 파티까지 모두 응용가능. 3. 그냥 예쁘고 눈에 띄는 옷, 연예인 누가 입고 나왔다는 고급 브랜드 옷의 싸구려 카피본들을 마구 걸쳐도 좋은 건 이십대 초반까지다. 나이가 들면 저렴해 보이는가, 그렇지 않은가, 하는 문제가 쇼핑의 새로운 화두로 떠오른다. 실상 저렴하면서 그렇지 않아 보이는 옷들, 이태원 시장에 많더라.

Posted by 알 수 없는 사용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