반짝이는 건 은수저부터 껌종이까지 죄 둥지로 물어나르는 까마귀처럼, 할인매대에 누운 옷들을 게걸스레 긁어모은다. 그게 시작이다. 그러다 점차 옷걸이에 걸린 옷들로 눈이 가고, 제몸에 맞는 핏을 찾아내고, 웬만하면 자신을 실망시키지 않는 브랜드 몇가지를 골라 충성하는 단계가 온다. 다음은 구두다. 그 다음은? 가방? 혹자는 옷-구두-가방-속옷-시계-주얼리가 패션 마니아 혹은 패션 신불자로 가는 수순이라고 말한다. 그렇다면 그 다음은? 붓글씨의 대가가 종국엔 괴발개발 어린애 낙서로 돌아가곤 하는 것처럼, 지름의 끝에 이르면 물욕이 일지 않는 무념무상의 경지가 펼쳐질까?

뉴욕에 온 지 두 달만에 빈티지 숍과 디스카운트 스토어를 돌며 야금야금 사들인 신발이 벌써 6켤레. 그전까지 평생 내 돈 들여 산 신발 수와 맞먹는다. 어젠 급기야 상품권 남발하는 웬만한 국내 가죽 브랜드 제품한 가격인 30% 세일가에 나온 마크 바이 마크 제이콥스와 클로에의 가죽 백들을 보며 30분간 똥 마려운 강아지처럼 진열대 앞에서 안절부절 못하다가 눈물로 작별을 고하고 돌아섰다(안녕 마크, 안녕 클로에, 언니가 돈 많이 벌어서 데리러 올게, 라고 한국말로 소근대는 날 보며 센추리21의 흑언 언니는 몹시 의심스런 표정을 지었더랬다). 물론 가장 큰 이유는 돈이 없어서다. 그렇다고 이 불타는 물욕을 잠재울 자신은 또 없기에, 가격 대비 가장 효율적인 쇼핑을 곰곰 연구했다. 결론은, 이런저런 자질구레한 것들을 사고 또 사봤자 결국엔 눈만 살살 높아져 끝없이 돈을 써댈 테니, 차라리 엄청 비싸면서 절대 유행을 타지 않는 궁극의 물건을 하나 갖고 나머진 잊자는 거다. 그리하여 난샤넬백을 사기로 마음 먹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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샤넬 2.55백. 사랑하오. 나의 마지막 가방이 되어주겠소?

차라리 에르메스를 사지 그러냐고 비웃지들 마시라. 월급생활자의 로망이란 한계가 있는 법이다. 그렇다. 난 패셔너블하지도 않은 주제에 패션 신불자의 수순을 밟고 있다. 이십대 중반까진 상하의 각각 두 벌로 한 계절 나면서도 기죽거나 남 부러운 적 한 번 없었다. 주머니에 땡전 한 푼 없는 날도 많아 별명은 천년빈대 만년식객.’ 그러나 사회생활이랍시고 만나는 사람들에게 눈총 받기 싫어 TPO별 아이템을 구비하고, 이젠 또 나이가 있으니 너무 허름한 차림새는 곤란하다 싶어 철마다 의복을 개비하고, 사람 기분이란 게 만날 다른데 스타일은 어떻게 하나겠냐며 이것저것 시도하다 보니 또 옷장이 미어지고, 쇼핑 한 번 할 때 제대로 하자 싶어 잡지도 보고 시장조사도 했더니 세상에 예쁜 건 또 왜 이렇게 많아? 그리하여 내 인생 이 지경이 된 거다.

20년 전 담배를 끊은 어느 중년 아저씨가 최근 했다는 말. “난 담배를 끊은 게 아니다. 단지 20년 동안 참고 있을 뿐이다.” 그러매 생각컨대, 한번 맛 들이면 절대 끊을 수 없는 것 네 가지는 담배와 마약, 고기, 그리고 쇼핑이더라. 이젠 다시 상하의 두 벌로 한 철 버티는 삶으로 돌아갈 수 없으니, 어쩌면 난 남은 평생 카드 회사와 패션 브랜드들을 먹여 살리기 위해 소처럼 일해야 할지도 모른다. 아직 통장에 현금이 있고 여차하면 장사 밑천으로 쓸 전세보증금이나마 남았을 때 대책을 마련해야 한다, 요런 절박함이 요즘 부쩍 자주 엄습한다. 아예 지름의 끝을 보자, 라는 건 현재 찾은 유일한 해법이다. 물론 전제는 비싼만큼 오래오래 질리지 않는 물건이어야 한다는 거다. 그러니까 샤넬백, 니가 클래식이든 사치품이든 이젠 상관없어, 가보자 갈 때까지.

p.s. 샤넬 매장을 지척에 두고 아직 출동하지 않은 단 한 가지 이유는, 혹시 지름의 끝이 내가 상상하는 그런 경지가 아님 어쩌나 하는 일말의 두려움 때문이다. 샤넬백으로도 마크와 클로에의 결핍이 주는 공허를 달래지 못하면? 내 평생 남은 모든 간절기 코트와 맞바꾸기로 한 버버리의 베이지색 트렌치 코트도, 같은 이유로 아직 지르지 못했다. 남미 두어 개국 여행 예산과 맞먹는 그 아이템들을 훅 지르러 나서기 전에 누군가 무릎을 탁 칠만큼 타당한 이유로 나를 설득해준다면, 차라리 뉴욕 모든 매장에서 그 아이템들이 품절이면, 아니 내일 아침에 길을 나서다 눈먼 돈가방이라도 줍는다면 좋겠다. 뭣보다 큰 바람은, 돈 버는 게 딱 쓰는 것만큼만 쉬웠음 좋겠다는 거다.

Posted by 알 수 없는 사용자
읽은 건 죄다 복사하듯 기억하던 시절도 있었건만, 요즘은 조금 전에 읽은 구절조차 까맣게 잊어버리곤 합니다. 기억력이 흐려진 건지, 알코올이 드디어 대뇌의 주름 사이사이까지 알뜰하게 절인 건지, 아니면 오만가지 비루한 생각이 섞어찌개처럼 머릿속에서 들끓고 있기 때문인건지, 잘 모르겠습니다. 이유야 뭐가 됐건 무슨 상관입니까. 나는 노화를 겪고 있거나(기억력 감퇴), 문학과 인생에 대해 논하며 - 죄송합니다. 실은 '남자'와 '야구'에 대해 떠들며 - 권거니 잣거니 술잔을 기울이는 시절도 이제 막장이거나(알코올 부작용), 멸종 위기 동물 보호나 부시 암살 같은 건설적인 고뇌는 뒤로 미룬 채 먹고 사는 문제에만 골몰하는 자잘한 마음의 도시월급생활자인 겁니다. 뭐, 껄껄 웃으며 강남대로를 뛰어다닐 만큼 기쁘지는 않군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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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보르헤스에게 현실의 정수는 책 속에 있었다. 책을 읽고, 책을 쓰고, 책에 대해 이야기하는 것이 그 알맹이였다. 그는 수천 년 전에 시작돼서 한 번도 끝난 적이 없는 대화를 이어가고 있음을 본능적으로 인식했다. 책은 과거를 복원했다." 
- 알베르토 망구엘, <보르헤스에게 가는 길>


말도 마십쇼. 이 구절이 생각이 안나서, 책을 읽다 말고 세 번이나 다시 들춰봐야 했지 뭡니까. 알베르토 망구엘이 그러는데, 보르헤스는 실수로라도 뭘 잊어버리는 법이 없었대요. 백과사전부터 온갖 소설의 묘사, 수수께끼, 경구, 이탈리아의 장시, 오래된 탱고의 가사까지, 읽은 건 구체적인 구절을 암송할 정도로 모두 기억했다는군요. 정작 본인이 쓴 책은 단 한권도 집에 두질 않았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자신이 쓴 모든 문장을 남김없이 기억했다고도 하고요. 심지어 낯선 책방에 가더라도 책 등 한 번 쓰다듬어 보고 그 내용을 단박에 알아챘다고 합니다. 아, 말 안 했던가요? 보르헤스는 쉰여덟에 완전히 실명했습니다. 그리고 열여섯 살짜리 알베르토 망구엘이 저녁마다 책을 읽어주던 무렵에, 보르헤스는 이미 예순다섯이었습니다. 앞이 보이지 않는 보르헤스는 구술해줄 만한 사람이 나타날 때까지 마음 속으로 한 줄씩 문장을 썼고, 완성된 문장을 소리 내어 불러줄 때가 되면 완벽한 '글'을 막힘 없이 토해냈다고 합니다. 정말이지 대단하지 않습니까? 그러니 1964년부터 1968년까지 보르헤스와 함께 책을 읽고, 그가 불러주는 시를 받아 적었던 알베르토 망구엘은 뭐가 돼도 돼야하지 않겠습니까? (결국 이 사람은 '세계적인 독서가이자 저술가'라는 거창한 존재가 됐습니다. 책을 엄청나게 읽고 책 읽은 얘기를 쓰는 부러운 직업이랄까요. 내 방 책장에는 그가 쓴 <독서의 역사>라는 두꺼운 책이 꽂혀 있습니다.)

눈을 또록또록 뜨고 무엇이든 읽고 쓸 줄 아는, 그래봐야 겨우 서른 언저리인 나는 생각합니다. 난 대체 뭐가 문제인거냐. 하지만 닥치는대로 읽고, 또 어깨에 앉은 비듬 털어내듯 시원하게 잊어버리면서 다시 생각합니다. 우주를 떠도는 '기억력 에너지'란 게 있다면 말이죠, 보르헤스나 망구엘 같은 사람이 있기 때문에 나 같은 사람도 존재하는 것이 아닐까요. 그래야 우주 전체의 기억력 에너지가 일정하게 유지될 거 아니겠어요? 기억과 망각이 고르게, 공평하게, 민주적으로다가. (...라고 썼지만, 실은 헛소리 같습니다. 생각해봤는데 아무래도 술 때문이에요.)    

이쯤에서, 이 책의 권말에 수록된 '보르헤스 어록 사전'을 소개합니다. 읽으면서 깔깔 웃거나 무릎을 탁 치던 순간이 꽤 여러 번 있었는데, 역시나 책을 덮고 나니 머릿속이 참 휑합니다. 기억나는 것이라고는 '보르헤스 이 양반, 참 귀여우시구나' 하는 감상 밖엔. 무슨 말인지는 아래의 발췌한 부분을 읽어보면 아실 겁니다. 그리고 구절구절 총기 있게 잘 기억해두셨다가, 어느 날 어디선가 "보르헤스 어록... 사전이었던가?"를 웅얼거리며 쩔쩔매는 삼십대 여인을 발견하시면 슬그머니 다가와 귓속말로 일깨워주시면 감사하겠습니다.  



갖는다는 것: 쇼펜하우어는 우리가 가지고 있는 것이 우리를 행복하게 만들 수 없지만, 우리에게 부족한 것은 분명히 우리를 불행하게 만든다고 말했다. 가령, 어금니 통증으로 고통받는 사람은 그렇지 않은 사람들이 행복할 것이라고 생각하는 오류를 범한다. 사랑받지 못하는 것과 병에 걸리는 것은 어금니 통증의 또 다른 형태이다.

노벨상: 나는 영원히 미래의 노벨상 수상자가 될 것 같다. 아마도 그것이 스칸디나비아의 전통인 것 같다.

도서관: 도서관을 정리하는 것은 아무 말 없이 비평을 하는 행위다.

무용(無用): 나는 기린의 목이 너무 길다고 불평할 수 있지만, 그렇다고 그것이 기린의 모습을 바꿀 수는 없다.

무인도: 사람들에게 무인도로 가져갈 책이 무엇이냐고 물으면, 대개는 <돈키호테>라고 대답한다. 그러나 20일간의 휴가를 갖게 되면, 그들은 아무 책도 가져가지 않는다.

민주주의: 매우 널리 유포된 미신. 통계의 남용.

믿음: 나는 믿음을 가지고 있는 사람들이 특별하게 행복하다고 느끼지 않는다는 것을 알았다. 반대로 그들은 근심으로 가득 찬 세상에서 살고 있고, 하느님의 정의에 대해 끔찍한 두려움을 가지고 있으며, 그것도 모자라 받을 자격도 없는 상이나 벌을 기다린다.

보수주의: 보수주의자가 된다는 것은 정치적으로 회의주의자가 되는 것이다. 즉, 우리가 실수할지도 모르기 때문에 사물들을 바꾸려고 하지 않는 것이다. 우리가 살고 있는 세상은 그리 정의롭지 않지만, 다른 세상은 또 다른 형태의 부정(不正)이 될 수도 있다. 이것 외에도, 보수당은 광신(狂信)을 만들 수 없다는 장점이 있다. 우리는 광적인 민족주의자, 광적인 자유주의자, 광적인 공산주의자가 될 수 있다. 그러나 광적인 보수주의자가 될 수는 없다. 보수주의자가 된다는 것은 인내와 체념을 요구하기 때문이다.

복수: 복수는 아무 소용도 없는 것이며, 잔인하고 황당한 것이다. 진정한 복수는 망각과 용서다.

비행기: 비행기 회사는 공포를 조성하는 전문가인 것 같다. 비행기를 타면 우리는 "산소마스크가 얼굴 위로 떨어질 겁니다." "즉시 담배를 꺼주십시오." "구명조끼를 입고 공기를 넣으십시오"와 같은 말을 들을 수 있다. 하지만 당신이 기차를 탄다면, 기차가 충돌할 것이라는 말을 절대로 들을 수 없을 것이다.

서명: 나는 내 수많은 책에 서명을 했다. 그러므로 내가 죽게 되면, 내 서명이 없는 내 책이 훨씬 큰 값어치를 지니게 될 것이다.

선물: 사람들은 내 책을 구입하지만 읽지는 않는다. 그런데 왜 내 책을 살까? 한참이 지난 후에야 나는 내 책이 선물로만 사용된다는 사실을 알았다.

영향: 나에게 영향을 끼치지 않은 작가는 하나도 없다. 비록 내가 그들을 읽지 않았고, 내가 좋아하지 않는 작가라고 해도 말이다. 그러나 한 사람만을 선택하라면, 나는 주저하지 않고 체스터턴을 택할 것이다. 물론 버나드 쇼가 그보다 훨씬 훌륭한 작가이다. 하지만 우리는 우리가 모방하길 원하는 작가를 모방하는 것이 아니라, 우리가 모방할 수 있는 작가를 모방하는 것이다.

자살: 헤밍웨이는 스스로 목숨을 끊었다. 그것은 자기가 위대한 작가가 아님을 깨달았기 때문이다. 바로 이것이 그의 작품을 부분적으로나마 구원한 요인이다.

작위: 아마도 모든 장르 중에서 가장 작위적인 장르는 탐정소설일 것이다. 죄는 합리적 사고에 의해 들춰지는 것이 아니라 고발이나 밀고에 의해서 밝혀지기 때문이다.

잠자기: 잠을 자면 자신에 관해 잊게 된다. 그러나 잠이 깨면 자신을 기억한다.

젊음: 언젠가 누가 나에게 이렇게 물었다. "현대 시인들에 관해 어떻게 생각합니까?" 그러자 나는 이렇게 대답했다. "아주 젊은 시인이 있는데, 이름이 베르길리우스라고 하지요. 정말 전도유망한 청년입니다."

제안: 나를 비방하는 글들을 읽을 때마다, 나는 그런 감정을 공유할 뿐 아니라, 심지어 더 나은 방법으로 날 비난할 수도 있었을 것이라고 생각한다. 아마도 앞으로 있을 자의 적들에게는 그들의 비평을 출판하기 전에 나에게 보내라고 충고해야만 할 것 같다.

죽음: 만일 불멸이 존재한다면, 죽음이란 장난이다.

직업: 시인은 자신의 직업이 감정을 표현하는 것임을 알고 있는 사람이다. 그러나 자기가 남에게 충고해줄 수 있는 사람이라고 생각한다면, 그것은 큰 실수다.

타고르: 분명한 사기꾼이며, 스웨덴의 고안품. 그는 형편없는 시인이며, 장점이라고는 천국의 튜닉을 입은 것밖에 없다.

필요성: 우나무노는 불멸을 제시하지 않는 신은 믿을 수 없다고 썼다. 하지만 난 그렇지 않다고 생각한다. 내가 계속 목숨을 부지하길 원치 않거나, 우주가 나를 필요로 하지 않는다고 생각할지도 모르는 신이 존재할 수도 있다. 어쨌건 신은 내가 태어난 1899년까지 나를 필요로 하지 않았다.

하느님: 우리를 사랑하는 전지전능한 하느님이 있다는 생각은 환상문학의 가장 위대한 고안이다. 그러나 나는 하느님에 관한 생각이 리얼리즘 문학에 속한다면 더욱 좋을 것이라고 생각한다.

협박: 죽이겠다는 협박 이외에 다른 형태의 협박이 있을 수 있을까? 누군가를 불멸로 만들겠다고 협박하는 것은 아마도 매우 흥미롭고 독창적인 협박일 것이다.

확장: 쟁기와 칼은 손의 확장이다. 소우주는 눈의 확장이다. 그러나 책은 그 이상이다. 책은 기억의 확장인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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7호선의 두 여자

난달은 짐을 싸느라 몹시 분주했다. 우선 전세계약이 만료되어 이사를 해야 했고, 이직 계획에 따라 회사를 옮겨야 했다. 태생적으로 새로운 환경에 쉽게 적응하지 못하는데, 먹고 사는 터전과 본거지를 동시에 옮기느라 적잖이 애를 먹었다. 준비하던 과정, 옮길 채비를 하던 동안의 수고로움을 채 열거하지 않더라도 몹시 피곤하고 또 불안했다.
지만 보따리를 두 개나 꾸린 덕분에, 출퇴근의 동선은 단출해졌다. 7호선 지하철에 오르면 환승 한번 없이 목적지에 다다른다. 걷는 시간까지 모두 합쳐 집을 나서 회사까지 소요되는 시간은 넉넉잡아 1시간 10분. 아침부터 온갖 향수와 화장품 냄새에 휘둘려야 한다는 것, 인파 속에 파묻혀 40분 동안 꼼짝달싹 못하는 것이 달갑지는 않지만 그런대로 견딜 만하다.
원 지하철을 타고 저마다의 일터로 향하는 사람들의 표정은 대체로 어둡다. 그건 아침햇살이 찬란한 뚝섬역을 지날 때도 마찬가지이다. 지하를 벗어나 이제 막 교상역과 마주한 그 잠깐의 보너스 같은 차창 밖 풍경에도 사람들은 떼꾼한 눈으로 휴대폰의 화면이나 무가지를 들여다보느라 여념이 없다.
자를 보는 대신, 나는 여자를 관찰한다. 잠이 덜 깼어도 예쁜 여자를 바라보는 건 자몽과즙을 마시는 것처럼 상쾌한 일이다. 하지만 지하철 승객 중 상당부분은 생활 전선에서 온몸을 불사르는 투사처럼 강인한 인상이다. 오십대로 보이는 그녀 또한 그랬다. 그 좁은 공간을 헤집고 들어선 뒤 기어이 노약자석 앞에 선 그녀는 지구의 역사가 시작할 때부터 이미 그 좌석의 주인인양 당당하게 이미 자리에 앉아있던 여고생을 일으켜 세웠다. “이봐, 학생, 좀 일어나. 나 좀 앉게.” 화들짝 놀란 표정으로, 여고생은 머쓱하게 자리를 내주고 말았다.
리를 강탈한 아주머니는 고맙다는 말 한 마디 없이 식전 댓바람부터 어딘가로 전화를 걸어 목청껏 떠들었다. 무엇이 그녀를 그토록 억세고 경우 없이 만든 것일까. 살아온 세월이 힘겨워서 그랬을 거라고, 험한 세상과 대적하느라 적당히 몰염치해졌다고 치부하더라도, 그녀의 태도는 무모할 만큼 자기중심적이다. 모진 세월을 견뎠으면서도 충분히 넉넉하고, 다른 사람에게 너그럽고, 아침의 만원 지하철을 탔어도 식은땀을 흘리는 누군가에게 자리를 내줄 수 있는 그런 어른들을 나는 알고 있다. 그건 교육의 혜택을 충분히 받고 안 받고의 문제만은 아닌 것 같다. 어디까지나 그건 ‘마음’의 문제이고, ‘생각’의 문제라고 생각한다. 마음과 생각이 온통 자신을 향해 있는 사람으로서 젊은이들로 하여금 어른대접을 기대한다면 그건 분명 잘못된 것이다.
화통화를 마친 그녀는 몇 정거장 못가 사람들을 향해 소리쳤다. “어이, 어이, 거기 비켜, 비겨 서!” 한 발자국 떼지 못할 그 공간에서 과연 어디로, 무엇 때문에 비켜서라는 말인지 아주머니를 향해 되묻는 젊은이는 아무도 없다. “안 보여, 상봉역 안 보여, 그렇게 가리고 섰으면 내가 (전광판이) 안보이잖아!”

현역에 내리면 강남역이나 뱅뱅 사거리 방면으로 가는 사람들이 셔틀버스를 타기 위해 긴 줄로 서있다. 그 한편으로는 택시를 잡아타기 위한 짧은 줄도 보인다. 오늘 아침 나는 ‘택시 쪽’으로 줄을 섰다. 몇 대쯤 떠나보내고 마침내 차례가 왔을 때, 역으로부터 막 뛰어올라선 여자 하나가 내 앞으로 후다닥 끼어들었다. 행렬을 보았을 테니 설마 새치기를 할까 생각했는데, 택시가 당도하자 추호의 망설임도 없이 문을 여는 것이다. 하도 어이가 없고 괘씸해서 그 앞을 가로막았다. “아가씨, 기다리는 사람들 안 보여요? 제가 탈 차례인데요.”
안한 마음에 뒤로 물러설 거란 나의 추측은 여지없이 빗나갔다. “타시면 되잖아요! 잘 하면 한 대 치겠네?” 적반하장이란 말은 이럴 때 쓰는 표현일 것이다. 그 싹수 노란 주둥아리를 양손으로 확 찢어놓고 싶었지만 더이상 택시를 기다리게 할 수 없으니 참을 수밖에. 눈을 부라리며 성을 내던 그녀는 성큼성큼 앞으로 나아갔다. 순서대로 기다리는 행렬 같은 건 아무래도 상관없으니 저 앞쪽에서 자리를 잡고 택시를 먼저 낚아채겠다는 심산이었다. 다른 사람의 기분, 다른 사람의 시간, 다른 사람의 아침 같은 건 내 알 바 아니라는 그녀의 태도는 도대체 어디서 배워 처먹은 것일까.
지옥엽, 너무나 곱게 키워져서 스스로의 싸가지 없음을 모를 거라고, 오늘까지 지각하면 당장 회사에서 잘릴 위기상황에 직면해서 잠시잠깐 몰염치했을 거라고 이해해주려해도, 그녀의 태도는 무모할 만큼 자기중심적이다.
오늘은 밀린 업무를 해결하느라 몹시 분주한 하루였다. 출근 나절 똥을 밟아서일까. 온종일 되는 일이 하나도 없어 일찌감치 정리하고 회사를 벗어났다. 나이가 많든 적든, 지하철 안에서 만났던 밖에서 마주쳤던, 경우 없는 여자들로 인해 또다시 기분 잡치는 경우가 없길 바라며 나선 거리. 강남의 대로는 여전히 여자들로 가득하다. 아침의 기분 같은 건 잊어버리고, 그래서 또다시 행복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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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런저런 성적인 가설들. 과연 사실일까 거짓일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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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처:DAZED & CONFUSED UK





1. 결혼하면 피부가 좋아지고 예뻐진다?  YES!
결혼을 하면 주기적인 섹스를 하게 되는데 이런 주기적인 섹스는 여성의 피부를 맑고 깨끗하게 해준다. 뿐만 아니라 한번의 성관계에 약 2백 칼로리의 에너지가 소비되니 다이어트에도 효과적이며 남녀가 사랑을 나눌 때 분비되는 엔돌핀은 면역기능까지 높여준다. 때문에 결혼한 이후 유난히 피부가 고와지고 생기발랄해지는 여성이 있다면, 그녀는 남편과 만족스러운 성생활을 즐기고 있다고 봐도 억측은 아닌 셈이다.

2. 키스할 때 오른쪽으로 고개를 돌리는 사람이 많다? YES!
키스할 때 고개를 왼쪽으로 돌리는 사람보다 오른쪽으로 돌리는 사람이 무려 두 배나 많다. 신기한 것은 이 같은 습관이 어머니 뱃속에서부터 갖고 나와 평생 변하지 않는다는 사실이다. 독일의 한 교수의 연구결과에 따르면 키스할 때 오른 쪽으로 고개를 돌리는 사람은 대부분 오른손잡이일 확률이 크며, 이 경우 발과 눈, 귀 역시 오른쪽을 훨씬 많이 사용하는 비대칭형 습관을 갖고 있는 경우가 많았다. 이는 태어날 때 시각방향이 오른쪽으로 치중되면서 지각 및 운동방향에 영향을 미치기 때문인 것으로 조사됐다고 한다.

3. 여자의 발목이 가늘면 정력도 좋다? NO!
발목이 가늘면 질 수축력도 좋을 것이라는 속설이 있다. 물론 발목이 가는 여성일 경우, 그렇지 않은 여성들보다 섹시하게 보이는 경향이 있고, 여성의 가는 발목에 대해 페티시즘을 갖는 남성들도 꽤 많은 편이다. 하지만 가는 발목은 질의 수축력, 즉 신축성과는 아무런 관련이 없다. 따라서 여자의 발목과 정력에 관한 이 속설은 잘못 통용되고 있는 것으로, 질의 신축성은 발목의 굵기 여부와는 상관없이 케겔 요법이라는 근육 조이기 훈련으로 개선될 수 있다. 

4. 가슴은 만지면 만질수록 커진다? NO!
남자의 성기가 접촉이나 자극으로 인해 발기되는 것과 마찬가지로 여성의 가슴 역시 호르몬 분비 등의 영향을 받아 조금은 커질 수 있다. 성경험을 가진 남성들의 고백에 따르면, 실제로 여성의 가슴을 애무했을 때 단단해지는 유두와 함께 가슴 또한 커지는 듯한 느낌을 받는다고 한다. 하지만 작은 가슴이 단순히 만져주는 것만으로 커진다면, 이 세상 모든 유부녀들의 가슴은 ‘젖소부인’ 수준에 이르렀을지 모를 일이다. 건강하고 아름다운 가슴은 충분한 운동과 영양공급이 수반되어야 함을 명심하자. 

5. 마늘을 많이 먹으면 페니스가 잘 선다? YES!
마늘은 호르몬 분비샘을 자극해 남성의 정자와 정액의 양을 증가시키고 말초혈관계의 노폐물을 제거해 발기력 증강에도 도움을 준다. 삼복 등을 핑계로 찾아먹는 음식을 포함 한방에서 권하는 ‘정력 음식’들은 다 나름의 영양 성분으로 건강, 정확히 말해 호르몬 분비를 촉진하는 제 몫을 해내는 것들이다. 따라서 주말 부부들이나 해소할 방법 없는 청춘들이 조심해야 할 음식인 셈. 마늘 너무 많이 먹었다간 마늘의 정력 증강 효과 때문에 ‘불끈’ 솟아오르는 힘을 주체하지 못하면 일주일이 괴로울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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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처 : DAZED & CONFUSED UK

6. 털이 많은 사람은 정력이 세다? NO!
체모는 남성 호르몬의 자극을 받아 성장하므로 남성 호르몬이 비정상적으로 적게 분비되    는 사람은 체모가 적게 나는 것이 일반적이다. 이런 속설은 남성 호르몬이 많이 분비되는 사람일수록 성욕이 높다는 일반론에 의거해 돌고 있는 것. 하지만 털이 많다고 해서 남성 호르몬이 많이 나오는 것은 아니다. 남성 호르몬 수치나 다른 2차 성징이 모두 정상인데도 불구하고 음모가 전혀 나지 않는 사람도 있다. 정력은 순환기계, 내분비계, 중추신경계 등의 신체적 건강과 스트레스 없는 정신적 건강에서 비롯된다.

7. 마른 남자가 정력이 세다? NO!
이 속설은 비만이 ‘강한 남성’의 방해 요소임을 잘못 해석해 나온 것이라 할 수 있다. 살이 찌면 정상체중인 사람에 비해 내분비 장애를 일으킬 가능성이 높고, 내분비 장애가 일어나면 뇌하수체의 성 자극 호르몬이 줄어들어 발기부전, 조루증 등이 나타날 수 있기 때문이다. 또 살이 찐 사람은 지방층이 두꺼워 피부감각이 많이 둔화되어 있다. 그래서 절정에 이르게 되어도 국부 쪽에서만 예민한 감각을 느끼게 되어 ‘초조루형‘이 되기 쉽다. 때문에 ‘뚱뚱한 남자보다는 마른 남자가 정력이 세다‘는 속설이 나온 것이다. 또한 ’마른 남자의 페니스가 상대적으로 더 크다‘는 속설 또한 비슷한 맥락으로 해석될 수 있는데, 일반화하기엔 개인적인 편차가 너무 큰 가설 중 하나가 바로 이것이다.

8.남자가 마스터베이션을 많이 하면 정력이 감퇴된다? NO!
자위행위를 하면 정력이 감퇴된다는 속설이 떠도는 이유는 아마도 성적 욕구가 왕성한 사춘기 시절 자위행위로 인해 생긴 죄책감과 걱정 때문에 만들어진 것으로 해석된다. 자위행위는 신체적으로 어떠한 문제도 일으키지 않는다. 단 여성들의 자위행위의 경우, 어떤 방식이나 도구를 이용하느냐, 자위행위를 어느 기간 지속해왔느냐에 따라, 만족도를 느끼는 성체위가 달라질 수도 있다. 실제로 남자들과 마찬가지로 오형제(?)를 이용하느냐, 영화속에서 자주 등장하는 음식이나 성기를 닮은 도구를 이용하느냐, 탁자 모서리 등의 고정된 사물을 이용하느냐에 따라, 질의 생김새가 많이 변형될 수 있으며(물론 기간의 문제도 있겠지만), 그 변형된 모양에 따라 성기를 삽입하면서 남성이 느끼는 느낌 또한 많이 달라진다고 한다.

9. 오줌발이 센 남성은 변강쇠? YES!
배뇨와 사정 모두 자신의 의지와 상관없는 자율신경계의 지배를 받고 있다. 따라서 배뇨가 원활하게 잘 되는 남성은 발기력도 좋다고 할 수 있다. 그러나 약해진 오줌발이 꼭 정력의 약화로 이어지는 것은 아니다. 왜냐하면 배뇨 능력의 약화는 전립선 질환, 요도종양 등의 질병에 의해서도 생겨날 수 있기 때문.
 
10.콘돔을 끼우면 조루가 일어나지 않는다? NO!
이것은 예민한 음경의 감각을 둔화시킬 목적으로 콘돔을 착용하면 감각이 무뎌지겠지 하    는 생각에서 나온 잘못된 속설이다. 피부에 한 꺼플 씌워지는 것이기 때문에 피부로 삽입하는 것보다 감각이 무뎌질 수 있다. 때문에 행위시간이 좀 더 지속되는 느낌이 들 수는 있으나 그것 자체로 조루를 막을 수는 없다. 따라서 이것 역시 일반화할 수 없는 가설. 오히려 콘돔 착용으로 인해 성적인 흥분이 감소될 수 있는데, 이건 남성은 물론 성경험이 있는 대부분의 여성들도 인정하는 부분. 그러니 콘돔은 그 애초의 목적-피임이나 에이즈 예방-으로 사용되는 것이 가장 바람직 하다.

11. 생리는 전염되는 것이다? YES!
엄마나 여자형제, 그리고 단짝친구나 동료들과 비슷한 시기에 생리를 하는 경우가 많다. 마치 전염이라도 되는 듯. 때마침 걸린 마술, 급하게 생리대를 찾으면 주위 누군가는 꼭 상비하고 있는 경우도 종종 있다. 우연의 일치라고 생각하고 넘어갔겠지만, 여기에도 과학적인 이유가 존재한다. 바로 페로몬 때문. 생리를 할 때도 독특한 페로몬이 형성된다. 그 냄새에 인체가 반응을 하기 때문에 이성 간에는 서로 끌어당기는 역할을 하지만, 동성 간에는 서로의 배란 주기를 맞춰주는 기능을 하게 되는 것이다. 전염된다는 말이 정확하진 않지만, 종족 보존 및 번식 본능이라는 야생의 습성이 아직 남아서 신체가 자연스럽게 반응하게 되는 것이다.

* 엘르 재직 시절, 전문가들의 코멘트를 받아 정리했던 내용을 일부 가져왔음을 밝힙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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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지막 날 밤에 그녀가 말했다.
"나는 당신이 나를 사랑하지 않는다는 걸 알아요. 하지만 그렇다고 해서 내가 당신한테 안 어울리는 여자라는 뜻은 아녜요. 당신은 자기 멋대로 하는 사람이니까 떠나야 한다면, 좋아요, 떠나야겠죠. 하지만 내가 여기 있다는 것만 기억해 둬요. 어쩌다가라도 누군가의 팬티 속으로 기어들고 싶어서 근질거리면 내 팬티를 맨 먼저 생각해요."
  - 폴 오스터, <우연의 음악>


: 저렇게 말할 수 있는 여자를 어떻게 생각해야 할까요.
그녀는 당신이 짐작하는 것보다 훨씬 더 대담하고 똑똑하다고? 저 태연한 선언 뒤에는 그렇게 '즉물적'이고 '굴욕적'(이라고 타이핑하는 순간, 나의 애정관, 혹은 남성관, 혹은 가장 거대한 욕구가 어떤 종류인지 백일하에 드러나는군요)인 대상으로 남는 한이 있더라도 그를 잃는 일만은 모면하려는 가여운 여자가 숨어 있다고? 그녀는 완벽하게 건조된 감정의 소유자이며, 그에게 바라는 것은 질척한 구애가 아니라 오직 단도직입적인 섹스 뿐이라고? 떠나는 발 뒤꿈치에 매달리고, 애정을 구걸하고, 끈끈한 눈물을 흘리고, 심장이 터져나갈 애정을 가감없이 보이는 짓이야 말로 남자를 도망치게 만드는 악행이라 믿는 그녀는, 실은 정치적이고 외교적인 유혹의 대가라고? 서랍 속의 검정 양말처럼 흔하디 흔해서, 하나쯤은 줄어도 상관 없는 섹스 파트너에게 될대로 되라는 심정으로 실험적인 화법을 시도해보는 초연한 여자라고? 실은 저런 여자는 이 세상에 존재하지 않으며, 그녀의 대사는 이 책을 쓴 폴 오스터가 남자이고, 그를 비롯한 이 세상 모든 남자들의 대뇌 어딘가에 아련한 판타지로 저장되어 있는 '그 무언가'를 직설적으로 꺼내놓은 것이라고?
글쎄. 난 잘 모르겠습니다.  

어른이 되자 연애는 더 이상 발렌타인 데이의 초콜릿처럼 달콤하지 않았습니다. 소녀 취향의 판타지와 그를 향한 단순한 열정은, 연애가 사랑의 동의어가 아니며 실은 상대에게서 내 욕망을 채우려고 끙끙대는 구차한 과정이라는 사실을 깨달으면서 자취도 없이 증발했지요. 사랑은 다분히 관념적입니다. 이를 테면 신(神)이나 정의, 공중도덕처럼, 존재한다는 사실을 증명하기보다는 그저 믿어주어야 하는 가치인 것이죠. 그러나 연애는 금요일 오후 7시의 영화 티켓이나 언 손을 덥히는 36.5도의 체온이나 인터넷으로 주문한 콘돔 상자처럼 촉감이 있는 현실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영원할 수 없어요. 그래도 연애는 사랑을 지향하리라 믿었습니다. 적어도, 그렇게 믿고 싶었던 것 같네요.



"나는 당신에게 돌아오겠다고 했소. 난 지금 약속을 한 거요."
"나도 당신이 약속을 했다는 거 알아요. 하지만 그렇다고 해서 당신이 약속을 지킬 거라는 뜻은 아녜요."
 
- 폴 오스터, <우연의 음악>



: 또, 또 이럽니다. '연애소설'과는 KTX 타고 네 시간 거리쯤 떨어져 있는 <우연의 음악>에서 고작 이런 구절이나 집어내다뇨. 사실 이 책을 읽은 지는 꽤 됐습니다. 동대문의 헌책방에서 '오늘 막 들어온 헌책'(묘하게 역설적인 표현 아닙니까?)이라며 주인 아저씨가 뻐기듯 내줬던 책이죠. 읽은 지는 2년쯤 되어서, 현실과 환상의 경계를 백일몽처럼 들쑤시던 그 얼개 사이로 또렷한 것은 이 몇 문장 뿐이네요. 책을 읽던 그 무렵 골몰하던 생각 때문이었겠죠. 2006년의 나는 생각했습니다. 세상이 달라졌고 사람들이 변했고, 그래서 연애의 풍경도 예전과는 다르지만, 그래도 그 달라진 껍데기 안에 도사린 본질만은 그대로라고요. 2006년의 나는 또 궁금했습니다. 대체 나는 네게서 무엇을 보고 무엇을 믿어야 하나? 무엇을 가져야지 나는 너를 온전히 가졌다고 안도할 수 있나? 그리고 2006년의 나는 머리가 아팠습니다. 연인에게서 갈망하는 것은 1986년이나 2006년이나 조금도 달라지지 않았는데, 이제는 내 진심을 보이는 것조차 전략과 전술이 되어 피 튀기는 연애의 전장을 이리저리 헤매야 하는 기분이었으니까요. 그때의 나는 이렇게 썼습니다. "'너만을 원한다'는 허물어진 고백보다는 섹스 후의 '즐거웠어, 그럼 안녕'이 쿨하고, '이제 너를 너무 사랑해서 나도 어쩔 수가 없어' 같은 끈끈한 호소는 그를 지구 반대편으로 도망치게 만들 거라는 강박. 밀었다가 당겼다가, 조였다가 풀었다가, 감추었다가 보여줬다가…를 반복하는 감정적인 첩보전이 연애란 말인가. 정말 그런 건가."       

2008년의 나는 생각합니다. 그것도 한 때구나. 조지 버나드 쇼는 “사랑은 두 사람이 서로 다른 점을 과장하는 흥미로운 과정”이라고 말했다는데, 그렇다면 연애는 두 사람이 서로 다른 점을 은폐하는 과정인 것 같습니다. 그 은폐에 지치거나 심드렁해지면 연애도 끝이 나겠죠. 그러니 연애가 언제나 사랑을 지향하는 건 아닌 셈입니다. 씁쓸하지만 받아들이기로 해요. 세상에는 불가항력이라는 것도 있으니까.



* <W KOREA> 2006년 3월호에 이 글의 일부가 실린 적이 있습니다. 하지만 이 글을 쓴 사람은 어쩐지 그때와는 꽤나 다른 사람이 된 것 같네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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ibm x31. 벽돌, 아니죠~. 노트북, 맞습니다~.

머리 끝부터 발 끝까지 샤넬로 휘감은 여자는 권위를 중시하고 클래식을 사랑하는 업타운 레이디고, 디올이나 돌체 앤 가바나를 입은 여자는 화려하고 섹시하며, 비비안 웨스트우드는 자유분방한 펑크걸의 아이콘이라는 식으로, 특정 패션 브랜드들은 그것을 소비하는 자체만으로도 사람들의 이미지를 고정시키고 범주화하는 역할을 한다. 어디 패션만 그렇겠나? 청담동에서 8천원짜리 커피를 마시는 여자와 커피빈 쿠폰을 열심히 채우는 여자와 지하철 자판기 커피를 마시며 위생을 걱정하지 않는 여자, 그리고 '궂은 비 내리는 날 그야말로 옛날식 다방에 앉아' 맥심 커피를 마시는 여자에 대한 타인들의 시선은 모두 제각각이며, 우리의 소비는 때로, 아니 대부분, 제품 자체의 질보다 그런 시선과 이미지에 좌우된다.

제품에 대한 정보나 식견, 취향이 부족할 때, 타인의 시선과 이미지라는 요인은 보다 노골적으로 소비자의 선택에 영향을 미친다. 시선과 이미지에 신경을 쓴다는 것은, 정치의 'ㅈ'자도 모르지만 돈 많고 보수적인 아저씨들은 한나라당을 지지하고 왠지 반골 기질 있는 아티스트들은 민노당을 지지하기에 '그럼 나도 민노당' 해버리는 것과 비슷하게, 특정 제품의 소비자 그룹이 가진 특성과 가치관에 동조하는 행위이기도 하다. 강남에서 인천까지 먼길을 달려 업어온 나의 ibm x31을 보고 일명 '소니빠'인 언니가 혀를 끌끌 찰 때 내가 의연할 수 있었던 것도, 컴퓨터라곤 워드와 인터넷밖에 할 줄 모르는 내가 그 물건에 대한 뭔 소신이 있어서라기 보다, 언니 표현을 빌면 '신소재 건축 마감재' 혹은 '시커먼 벽돌'처럼 생긴 x31을 '명품 노트북'이라고 추켜세우는 해당 유저들의 성향에 깊이 매료되어서다.

컴퓨터 중고 장터를 보면 불량화소나 외관상의 흠집 하나에 가격이 뚝뚝 떨어지고, 어디 금간 데라도 있으면 당장에 고물 취급을 하고, 성능과 하등 관계 없는 박스 보관 여부로 판매자의 성의를 가늠하곤 한다. 하지만 ibm 유저들은 담대하다. '상단 배젤에 크랙 있습니다.' '액정에 5cm 정도 흰 멍 있습니다.' '자판 번들거림 있습니다.' 정도 멘트는 인사성으로 오가고, 마티즈를 스포츠카로 튜닝하는 자동차 광들처럼 구형 노트북에 총력을 기울여 듣도 보도 못한 사양으로 업그레드 해놓고 자기들끼리 감탄하며 신형 노트북 맞먹는 가격에 사고 팔기 예사다. 유저들 중에 유독 공대생이나 연구원들이 많고, ibmmania 사이트 같은 곳에서 이따금 여성 회원이 발견되면 8차선 고속도로로 뛰어든 멸종위기생물이라도 되는 양 호들갑을 떠는 것도 왠지 신뢰를 더하게 했다. 진료는 의사에게, 약은 약사에게, 컴퓨터는 '공돌이'에게, 라는 게 나의 철학이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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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티브 잡스가 신제품 발표회 때 서류봉투에 담아와 화제가 된 맥북 에어.


'내건 다 예뻐야돼'라는 친절한 금자씨 마인드인 언니는 한동안 '소니빠'를 지향하다 지금은 '애플 맥북 에어'에 꽂혀 호시탐탐 기변을 노리고 있다. 반면 '기계는 기계다워야 한다' 주의인 나는 43만원에 구입한 중고 노트북을 '까짓 깨질 테면 깨져라' 하고 케이스도 없이 가방에 넣어다니며 막 굴리고 있다. 언니는 백화점에서 200만원이나 주고 덜컥 구입한 소니 노트북의 용량이 적어 짜증난다며 나의 100만원짜리 중고 후지쯔를 마르고 닳도록 빌려 쓰던 것처럼, 앞으론 맥북 에어를 관상용으로 모셔두고 x31에 묻어가려는 모양이다. 

어느 ibm 유저는 새 노트북을 사서 과사무실에서 뻐기듯 꺼냈더니 여자 후배가 "선배, 노트북 바꿀 때 됐나봐요?" 그랬다고 한다. 이해한다. 단순하다 못해 투박한 ibm의 디자인은 아무리 봐도 여자들이 좋아할 스타일은 아니다. ibm 노트북을 쓰는 여자, 지금껏 주변에서 딱 두 명 봤다. 그 중 한 명은 패션 에디터였는데, 공대 나와서 연구소 다니는 남편의 추천이라고 했다. 난 그녀가 원피스에 모피 코트를 입고 사무실에 앉아서 시커먼 ibm 노트북을 상대하는 모습이 늘 보기 좋았다. 예뻐야 할 건 예쁘게, 튼튼해야 할 건 튼튼하게, 옷은 옷답게, 기계는 기계답게, 그 마인드가 맘에 드는 거다. 그러니까 ibm 노트북을 중고로 사는 여자라고 해서, 칙칙한 괴짜일 거라 상상하면 곤란하단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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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노는 이제 16살. 청소년 관람불가 영화도 볼 수 없는 나이인데, 남자친구와 성관계를 가졌고 졸지에 임산부가 되었다. '10대의 임신'이란 설정에 대한 도덕적 판단은 중요하지 않다. 어떻게 하면 이 현실을 슬기롭게 해결하느냐가 더 큰 문제다. 누구보다도 현실 감각을 가지고 있는 주노는 친구와 '입양'을 석택한 뒤, 부모에게 털어놓기로 결심한다. 자, 여기서 퀴즈. 주노 부모의 반응은? 1번, 세상이 끝나기라도한듯 통곡한다. 2번, 엄청나게 분노하며 딸을 미친듯이 때린다. 그러나 답은 3번. 황당한 표정으로 '맙소사' 한 번, 곧 상황파악을 위한 각종 질문과 대안들이 오간다. 아이 아빠의 이름을 말하자 "굼벵이도 긴다더니"라며 살짝 비웃는 아빠. 뒤이은 주노의 "걔 나름 잘했어요"라는 대답. "성생활 하는 줄도 몰랐던" 딸에게 잠시 놀란 부모는 일단 "임산부 비타민부터 먹자"며 딸의 건강을 챙긴다. 물론 훈훈한 분위기는 아니다. 10대 자녀가 있는 가정은 어디나 서먹하긴 마찬가지. 하지만 가족은 위기 앞에서 서로의 의견을 존중하기로, 암묵적으로 합의한다. 화낸다고 시간을 되돌릴 수 있는 건 아니다.

펑크록과 공포영화를 좋아하는 주노는 남다른 유머감각을 내심 자랑스러워하며 10대의 세계에서 살고 있었다. 모든 말을 10대 언어로 소통하는 그녀는, '입양'을 계기로 안정된 삶을 구축한 30대 어른들을 만나 호기심을 품는다. 입양자로 선택된 바네사와 마크 부부는 블루 컬러 노동자 부모를 둔 주노가 상상해보지도 못했던 멋진 집에서 멋지게 살고 있는 사람들이다. 주노의 눈에는 아이만 있다면 정말 완벽할 가정으로 보인다. 그러나 아이가 태어나기도 전에 바네사와 마크의 균열이 조금씩 드러나자, '사랑'과 '어른'에 대한 주노의 환상은 무참하게 깨진다. 아이를 품고 있던 열달 동안 주노는 가족의 사랑을 새삼 깨닫고, 남자 친구와의 '사랑'에 대해서도 진지하게 생각하게 된다. 소재는 도발적이지만 <주노>는 영락없는 성장영화이자 가족영화다. 주노는 아이가 뱃속에서 머무르는 동안 여러가지 경험을 한다. 새엄마가 자신을 지키기 위해 억세게 말싸움을 하는 것도 지켜보고, 아빠의 변함없는 사랑도 재확인하고, 책임감 없는 30대 남자가 얼마나 끔찍한 존재인지도 깨닫는다. 약 10달 동안 어른의 세계를 경험한 주노는 '책임감'과 '믿음'이라는 인생의 교훈을 얻는다. 임신을 하지 않아도 점차 알게될 것들이었지만, 임신을 하고도 '성장을 할 수 있다'는 게 중요하다. 다시 예전의 몸으로 돌아온 주노는 좀더 솔직하게, 그리고 열심히 인생을 살아갈 수 있을 것이다. 주노 역을 맡은 앨런 페이지는 '세상에서 가장 꿋꿋한 10대 임산부'가 되기 위해 태어났다는 듯, 너무도 자연스러운 연기로 관객에게 신뢰를 안긴다. 어른들의 잣대가 아닌, 10대의 눈높이에 맞춰 진행되는 이야기는 쿨하면서 감동적이다.

한국에서 이런 훈훈한 10대 임신 수기가 가능할까? 임신한 10대가 부른 배를 내놓고 학교에 갈 수 있을까? 푸핫, 당장 퇴학감이다. 그런데 <주노>를 보고 나면 이런 의문이 든다. '10대'라는 이유 때문에 '임신'이 너무 큰 죄로 다뤄지는 게 아닐까? 어쩌다 한 번 저지른 실수 때문에 인생을 깡그리 포기해야된다는 건 너무 가혹하지 않은가? 미국이니까 가능하다는 의견도 있다. 그러나 <주노>에서 가장 감동적인 건 그녀의 상처를 최소화시켜주려는 주변인들의 노력 때문이다. 주노 자체가 용기 많은 소녀이기도 하지만, 그 용기의 이면엔 '실수'에도 불구하고 그녀를 믿어줬던 여러 사람들의 노력이 있다. 그렇기에 주노의 임신은 성장의 계기가 될 수 있었고, 새 생명은 세상의 빛을 볼 수 있었다. 우리는 결과를 중시한 나머지, 과정에서 벌어질 수 있는 모든 시행착오를 헛되다고 판단하는 경향이 있다. <주노>는 남들이 보기에 부끄러운 시행착오도 유의미하다고 말한다. 인생이 어떤 것인지는 누구도 모르기에, 함께, 머리를 맞대고, 열심히, 찾아가는 수밖에 없다.

+ 이 글은 <미즈내일>에도 게재된 글입니다.
+ 각본을 쓴 디아블로 코디는 이번 아카데미에서 각본상을 받았습니다. 전직 스트립 댄서 출신이라 화제가 됐는데, <주노>의 성공으로 스필버그와 작업하는 거물 작가로 인생역전 하셨습니다. 극적 전개도 멋지지만 10대 은어가 난무하는 대사들이 놀라울 정도입니다. '오린지'냐, '아륀지'냐를 따지고 있는 제3세계 국가에선 절대 따라갈 수 없는 언어생활이죠. 10대 내부 언어와 10대 외부 언어를 영민하게 대조시키며 두 세계를 부딪히게 만드는 기술이 특히 훌륭합니다.
+ 유머감각만이 이 세상을 구할 수 있어요. 이건 진리에요, 진리!

Posted by marsgirrr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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간만에 찰진 스릴러 <추격자>

평가는 간단하다. 재미있다. 아주 끈덕지게 재미있다. <공공의 적>보다 압도적인 웰메이드 모양새, <살인의 추억>의 뒷골목 도시 버전, <범죄의 재구성>의 또 다른 '발품' 형제라 부를 법하다. 한국판 형사 스릴러를 잇는 영화가 이제야 도착했다.
<추격자>의 모티프는 잘 알려졌다시피 유영철 사건이다. 그와 오버랩되는 극중 '사이코패스' 연쇄살인범 영민은 무표정한 얼굴로 인질이 된 매춘부의 머리에 망치와 정을 갖다댄다. 막 살인이 시작되려는 순간, 의도치 않은 벨소리가 울리고 상황은 계속 꼬인다. 그와 정면승부를 벌이는 건 경찰 출신 포주 중호. 사라진 여자들과 연관된 전화번호 하나만 믿고 추격에 나선 중호는 왕년의 형사질 실력을 발휘해 영민을 잡고야 만다. 기소까지 가능한 시간은 12시간. 그 안에 증거를 잡지 못하면 살인자라기보다 정신이상자처럼 보이는 영민을 풀어줘야 한다. 경찰 앞에 놓여진 또 하나의 압박은 똥 맞은 서울 시장(!) 관련 뉴스를 감추기 위해 연쇄살인범 사건을 대대적으로 터뜨려야 한다는 것. 중호에겐 사라져버린 매춘부를 찾아야만 하는 개인적 사연이 있고, 경찰은 대국민적 쪽팔림을 피할 업적이 필요하다. 그러나 정신이상한 살인용의자는 의외로 용의주도하다.
<살인의 추억>과 직접적으로 닮은 부분은, 증거 하나 제대로 찾아내지 못한채 우왕좌왕하는 무력한 경찰의 모습이다. 반면, 반은 직업정신(포주)으로 반은 본능적인 사명감(전직 경찰)으로 망원동을 헤집고 다니는 중호는 <공공의 적>의 강철중과 비슷한 다혈질 액션 방법론을 구사한다. 아무 생각없이 자신이 변태임을 서슴치 않고 커밍아웃하면서 치밀함을 잃지 않는 영민의 태도는 <범죄의 재구성>의 코미디와 <양들의 침묵>의 섬짓함을 오간다. 물론 이건 결과론적인 분석이다. <추격자>는 여러 영화에 대한 기시감을 불러 일으키지만 매끈한 봉합으로 자신만의 아우라를 만들어낸다. 풍자 코미디와 슬래셔 호러가 사이좋게 노늬는 양상이다. '내가 웃는 게 웃는 게 아냐' 내지는 '웃고 있어도 소름이 끼친다'라는 복합적인 감정을 제대로 건드린다.
동시에 <추격자>는 <우리동네> <가면> <세븐데이즈> 등이 극복하지 못했던 '반전 드라마' 강박관념을 가볍게 물리친다. 중호에게 계속 '추격' 동기부여를 주기 위한 휴머니티 장치(이것은 스포일러)가 끼어들긴 하지만, 이는 드라마를 위한 게 아니라 장르를 극단으로 몰고 나가기 위한 일종의 지지대다. 영민의 구구절절 사연같은 건 없다. '선'인지 '악'인지도 상관없다. 비뚤어진 사회구조의 책임도 굳이 묻지 않는다. 그저 그는 잡혀야 하는 존재이며, 평온한 포주 생활로 돌아가기 위해 여자 인질을 찾아 이 추격을 어서 마무리지어야 하는 중호의 피곤한 상황만이 존재할 뿐이다. 그래서 <추격자>는 '추격'에만 초점을 맞추며 2시간 5분을 종횡무진한다. 이 얼마나 쿨한 만듦새인가.
전개는 쿨하고 인물들은 징하다. 발품을 풀어 구성한 캐릭터와 대사와 상황은 현장감이 넘친다. 언덕배기 주거지인 망원동(촬영은 북아현동)을 십분 활용한 동선은 '한국형 스릴러'로서의 매력을 느끼게 한다('발품'은 제쳐두고 쓸데없이 과장된 세트를 꾸미고 요트까지 동원하며 촌스러운 럭셔리를 지향하신 <무방비 도시>가 고개 숙여 반성해야될 부분이다). <추격자>는 살인의 이유에 대해 일장연설을 늘어놓지 않지만 이틀밤을 관통하는 카메라를 통해 '막장 사회'의 면면을 찰지게 전달한다. <추격자>가 무서운 이유는 무엇인가? 18금 '망치' 살인이 끔찍해서? 끝끝내 밝혀내지 못하는 영민의 심리 때문이다. 한 사람의 어두움은 겉만 보고 판단할 수 없다. 어쩌면 우리 동네에도 악마가 살지 모른다. 처음 중호가 영민을 살인자로 믿지 못했던 것처럼, 악마를 상상하기에 개인의 상상력은 턱없이 부족하다. 상상 이상의 누군가는 사람 이상의 존재감을 갖는다. 경찰도 막을 수 없는 이 연쇄살인범이야말로 사회의 '괴물'인 셈이다.

+ 에피소드 한토막. 시사회 때 맨 끝줄(들어는 봤나 S열)에 앉게 되서 투덜거리고 있었다. 비상구쪽 의자가 비어 있었는데 무대인사를 마친 나홍진 감독이 떡하니 그 자리에 앉는 게 앉았다. "아뉘, 왜 배우들과 안 앉으세요?"(참고로 시사회에서 배우들은 가운데 중 가운데 자리)라 물었더니 털털한 목소리로 "영화 보다가 화장실을 잘 가서요"라고 말씀하시는. 감독이 옆에 앉았으니 신경쓰면서 볼만도 한데, 완전 몰입이 되서 몇 분뒤 그의 존재를 까맣게 잊었다. 나중에 보니 끝까지 앉아 계시더라. 좀 재미있는 캐릭터로 기억에 남을 듯.


* 이글은 제 개인 블로그 ncreep.egloos.com과 동일합니다. 새로운 생산에 게을러서 죄송.
Posted by marsgirrrl
사회생활을 끊고 동면 중인 처지라 발품 팔며 쇼핑 다녀본 지 오래됐다.
과로와 욕구불만 때문에 급사 직전에 이른 동료들의 응급처치용 쇼핑 행각에 말려들어 지난 12월 상콤하게 질러주었던 네 벌의 원피스를, 집밖에 나갈 일도, 만날 사람도 없단 이유로 아직 개시조차 못했을 정도.
하지만 '한 번 커진 씀씀이는 직장이 없어졌다고 다시 줄지 않는다'는 소비량 보존의 법칙에 따라, 요즘은 옷이나 장신구 대신 가구 구입에 열을 올리고 있다.

집은 다세대 주택의 12평짜리 분리형 원룸.
인테리어의 컨셉트는 마지 못해 블랙&화이트(가장 유행 안 타고, 싸면서 싼 티 덜 나고, 세트로 안 사도 대충 짝을 맞출 수 있기 때문).
가장 큰 미션은, 온 집안에 중구난방 굴러다니던 잡동사니들을 정리해서 발디딜 공간을 만들자는 것.
그리하여 지른 것들은...

1. 이케아 billy 책장. iikea.co.kr에서 개당 94200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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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립하고 세우는 데 개당 30분이면 오케이.
오래오래 쓸 도장 제품을 사고 싶었지만 30만원쯤 예산 차가 나서 눈물 머금고 이 녀석들로 결정. 
싸구려 같아 보이면 어쩌나 고민했지만, 학생 시절 구입해 10년째 사용 중이던, 체리색 시트지가 발린 펄프 책장과는 비교도 할 수 없게 튼튼하다.
책은 색깔별, cd는 국적별, 만화책은 사이즈별, 비디오와 dvd는 선호도순...이라는 제 멋대로 정렬 방식.
책장 폭이 넓은 편이라 무거운 것을 얹으면 휠 것 같은데, 선반을 뒤집어 쓸 수 없다는 게 아쉬운 점이다.
tip: 도장 가구란 페인트나 안료로 칠을 했다는 건데, 품질은 좋지만 호시탐탐 큰 집 얻어 이사갈 궁리만 하는 원룸족들이 쓰고 버려도 좋을 용도로 구입하기엔 꽤나 값들 나가주신다. 대부분 원룸에선 시트지를 붙인 저렴한 가구를 사용하는데, 시트지의 질이며 바르는 공법 같은 것들이 가지가지인 모양이다. 최근 화이트 서랍장을 하나 구입했다가 표면이 너무 미끄러워 도무지 먼지를 닦아낼 수 없는데다 군데군데 시트지가 울기까지 해서 반품한 경험이 있다. 반면 billy씨는 먼지도 잘 안 묻고, 청소도 쉽고, 보기에도 번듯한 편.

2. 블랙 캐비넷, gagubada.net에서 각 10만원, 14만5천원(모두 색상 변경 때문에 2만원 추가된 가격).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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옷장&서랍장 대용으로 구입했다. 업체에 전화해서 색상을 변경할 수 있다.
왼쪽 캐비넷은 안에 5칸의 선반이 있는데, 옷이 말도 못하게 많이 들어가며 서랍장에 비해 옷을 넣고 꺼내기도 쉽다.
오른쪽은 왼쪽과 같은 사이즈에 선반 대신 봉이 달린 옷장형 캐비넷을 사려다 사이즈가 안 맞아 선택한 2인용 옷장.  
옆에 보이는 2단 스탠드는 3년 전 집들이 선물로 받...았다기 보다 손님들에게 반강제로 뜯어낸 이케아 제품. 업라이트쪽은 밝기조절이 가능하다. 튤립 같이 생긴 아래쪽은 자유자재로 꺾어져 편리한 데다, 마이크 대용(??)으로도 쓸 수 있다.
커튼은 얻은 것이라 길이가 맞지 않는다. 하지만 화이트니까 일단 오케이.

책장과 캐비넷을 넣고 한 동안은 뿌듯해서 밥 안 먹고도 배불렀다.
그러나 차츰 들려오는 악평들.
"큐티나 오렌지 같은 일본 인테리어 잡지에 나오는 조잡한 오타쿠의 방 같아."
"여기 기숙사예요? 가정집으로 캐비넷 배달해본 건 첨이라..."
"뭔가...균형이 안 맞아. 갓 이사온 집 같아."

젠장. 젠장. 젠장.
다시 고민에 빠졌다.
이 사태를 수습하려면 도대체......뭘 더 사야 하지?
Posted by 알 수 없는 사용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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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형제 많은 집에서 자란 여자친구. 덕분에 양보심도 많고 성격도 좋다. 그러나 지나치게 엄격한 그녀의 오빠는 치명적 결함으로 남는다. 오라버니는 연애도 안하시는 걸까. 해만 지면 전화해서 분위기를 망치는데, 두 손 두 발 다 들었다. 오빠, 그건 ‘오바’라고요.
2. 아무래도 유년시절의 그녀는 <캔디>를 너무 열심히 시청한 것 같다. 항상 징징거리는 여자는 싫지만, 여자친구라면 가끔은 울어주고 엄살도 피워줘야 남자도 할일이 있는 것 아닌가. 언제나 이 앙다물고 뭐든 척척 잘 해내는 그녀는 연애도 일처럼 하려는 것인지. 누군가의 어깨가 전혀 필요 없는 그녀라면, 죄송하지만 사양하겠다.
3. 가끔은 사소한 것이 결정적이다. 의상, 헤어스타일 할 것 없이 머리부터 발끝까지 완벽하게 성장(盛粧)하고 나타난 여자친구. 그러나 화장하고 옷 입을 시간에 손, 발톱 정리도 좀 했으면 좋았을 것을. 때 낀 손톱과 발톱이 올 여름 트랜드가 아니라면 말이다.

4. 친절한 건 금자 씨 한 명으로 족하다. 누구에게든 너무나 친절하고 상냥한 그녀. 당신이 만인의 연인을 꿈꾸는 것이 아니라면, 조금만 자제해 달라. 세상에 뿌려진 친절만큼 당신의 인기는 올라갈지 모르나, 남자는 착각이 심한 단순한 수컷들의 음험한 시선에 짜증나 한다. 
5. 남자보다 더 무뚝뚝하고 무심한 그녀는 부담스럽다. 아무리 덤덤한 남자라도 가끔은 여자의 애교 섞인 애정표현을 기다리고 있는 것이니, 애정표현을 너무 아끼지 말라. 지나치게 효율적인 언어습관은 남자를 지치게 한다.
6. 그녀는 오래된 경운기인가? 어찌 그리도 ‘털털’한가? 세상 온갖 남자들의 짓궂은 농담과 장난질을 고스란히 받아주는 여자친구의 모습을 보고 좋아할 남자는 별로 없다. 혹 내 여자친구가 쉽게 생각되는 건 아닐까하는 생각까지 든다. 그럴 땐 차라리 깍쟁이라는 평을 듣고 다니는 편이 낫겠다는 생각마저 든다.  

7. 온 몸으로 자원봉사를 하려드는 여자친구는 슬쩍 짜증스럽다. 몸을 움직일 때 마다 슬쩍 슬쩍 보이는 속옷들. 짜증을 내는 나에게 ‘이 정도야 어때’ 라는 표정을 짓고 있으면, 눈앞으로 불자동차가 지나간다는 말이다. 로라이즈 진도 좋고 클레비지 룩도 좋으니, 제발 알아서 좀 가려주었으면. 작정하고 자원봉사를 하려는 것이 아니라면 말이다.
8. 랜덤으로 내 홈피에 방문했다는 여자의 미니홈피까지도 친히 방문하사, 뼈 있는 한 마디를 남기시고, 그 여자의 사돈의 팔촌까지 파헤치고야 마시는 여자친구의 집념(?)은 머리를 쭈뼛쭈뼛하게 한다. 바람피우는 척만 해도 구족을 멸할 듯한 감시의 눈빛을 띠고 있는 그녀라면 야반도주라도 불사하고 싶다.
9. 술을 좋아할 수 있다. 그러나 주사는 애교스러운 수준에서 끝내주었으면. 술 먹으면 싸우고, 울고, 노숙마저 기꺼워한다면 어느 누가 좋아하겠는가. 술만 먹으면 행방불명이 되는 여자친구의 행방을 수소문 하는 짓은 이제 그만하고 싶다.

10. 상대가 남자든 여자든 가리지 않는 여자친구. 그녀는 스트리트 파이터를 꿈꾸는 것일까? 제발 적당히 좀 해라. 행여, 나 없는 곳에서 무지막지한 남자와 시비라도 붙을 일을 생각하면 눈앞이 캄캄해 진다.
11. 어디에서든 분위기 메이커가 되는 건 좋지만, ‘무규칙이종 개그우먼’이 되는 건 피해 주었으면 한다. 활달한 여자친구는 좋지만, 하늘 아래 부끄러운 것이 하나도 없는 여자친구는 당황스럽다. “네 여자친구 완전 웃긴데” 라는 칭찬은 아무래도 뒤끝이 개운치 않은 것이다.
12. 아무리 볼 것 못 볼 것 다 본 사이라도, 남자란 자신의 여자에게 약간의 환상을 남겨두고 싶어 하는 것 같다. 그런데 마사지를 해주기 위해 붙잡은 여자의 조막막한 발 곳곳에서 제거되지 않은 굳은살을 보았을 때, 그 뭔지 모를 허탈감이란 생각보다 크다.

13. 좋다. 어깨 끈 하나 달랑 달린 슬리브리스도 좋고, 가슴선이 훤히 보이는 룩도 좋고 다 이해할 수 있다. 허나, 이왕 입을 거면 예쁘게 입어 주면 좋겠다. 얼마 하지도 않는 ‘투명 어깨 끈’ 살 돈 조차도 없는 건가? 없다면 사채 빚을 내서라도 줄 테니, 그 너덜너덜한 어깨 끈만은 좀 버려 주시길.
14. 다이어트 하는 건 좋다. 하지만 입으로만 하는 다이어트라면 처음부터 하지 말았으면 한다. 꽃노래도 세 번이다. ‘다이어트 해야 되는데’라는 말을 입에 달고 살면서 스트레스 받을 거라면, 차라리 그냥 먹고 튼튼하게 자라다오.
15. 그만하면 됐다는데도 끝까지 얼굴에 칼을 되겠다는 그녀. 지금 그대로도 충분히 사랑스럽다는 내 말은 옆 집 개 짖는 소리쯤으로 흘려들은 후, 끝끝내 비장한 얼굴로 수술을 받겠다고 우기면 있던 정도 떨어지지 않겠는가?


Posted by 알 수 없는 사용자